[취재일기] 美 테러를 이기는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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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요일인 22일 아침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선 국기게양식이 열렸다. 테러가 터진 11일 이래 반기(半旗)였던 성조기를 정상으로 올린 것이다.

오후엔 뉴욕 양키구장에서 '미국을 위한 기도회' 가 있었다. 대표적인 두 행사를 치르면서 미국은 공식적인 테러참사 추도기간을 끝내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인이 돌아온 곳은 옛날의 안락한 일상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것으로만 알았던 테러 불안이 어느덧 자신들 옆에 와 있다.

CNN 조사에서는 56%가 '불가피하지 않으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 고 했다. NBC 조사에선 60%가 제2 테러를 두려워 했다.

미국인에게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평화)는 더 이상 없다. 다른 나라는 평화로울지 모르지만 미국은 아니다. 미국인은 베트남전 때처럼 매일 아프간전쟁의 사상자수를 들어야 할 참이다. 지난 10여일의 터널을 빠져나와 미국인은 새로운 험한 세상으로 들어왔다. 역사는 그 기간을 미국의 '철학적 전환기' 로 기록할 지도 모른다.

그 10여일은 그러나 어두운 터널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빛을 다시 보았다.

우선 비극만큼이나 커다란 용기가 있었다. 수백명의 소방관.경찰이 불타는 건물에 뛰어들었다. 살아난 이들은 "그들이 그립다" 며 눈물을 흘린다. 미국을 떠받치는 '제복의 힘' 이다.

펜실베이니아에 추락한 비행기에 용감한 승객이 없었더라면 미 의사당이 날아가 버렸을 지도 모른다. 부시 대통령은 의회연설에 한 영웅의 미망인을 초청했다.

그녀는 일어섰고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미국을 지탱하는 '시민의 힘' 이다. 10여일간 미국에는 성금.헌혈.위로광고.성조기.자원봉사 그리고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 합창이 물결을 이뤘다. 미국을 살리는 '단결의 힘' 이다.

물론 갈등과 논란의 골도 깊다. 테러를 막지 못한 정보기관은 도마에 오를 판이다. 아랍계에 대한 감정적 보복도 있다. '미국이 테러의 씨앗을 뿌렸다' 는 원죄의 논쟁도 시끄럽다. '무고한 아프간 민간인이 죽는다' 는 반전(反戰)론도 적잖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은 지금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인류사상 최악의 비(非)문명 테러-. 통곡했던 미국은 지금 주먹을 쥐고 일어나고 있다.

김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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