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74. 영웅과 역적의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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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구성원 개인이 '나'를 앞세운 조직은 어디로 가는가. 얼마 전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그 답을 보여준 장면이 있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커트 실링(보스턴 레드삭스 투수)은 화려한 영웅으로 떠오르고, 알렉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 타자)는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그 출발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로드리게스의 삼진 하나다. 양키스가 3승1패로 앞서 월드시리즈 진출에 1승만을 남긴 5차전, 8회초 1사 3루에서 맞은 타석이었다. 더욱이 양키스는 4-2로 앞서 있었다. 레드삭스에는 반격의 기회가 2이닝밖에 없었고, 양키스 불펜에는 철벽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키스가 1점을 더 보태 5-2가 되면 승부는 그대로 끝날 분위기였다.

로드리게스는 2번타자. 뒤에 3-4-5번이 대기하고 있었다. 곤경에 처한 레드삭스 투수 마이크 팀린의 표정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생쥐 같았다.

로드리게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로서는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최고의 선수, 가장 비싼 선수로서 "챔피언!" 소리만 듣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그다. 그는 챔피언이 되기 위해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양키스로 팀을 옮겼다. 이 상황에서 외야플라이 한방이면 된다. 멋진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월드시리즈 진출, 그리고 챔피언 반지가 손에 잡힐 듯 보였을 것이다.

초구 유인구에 헛스윙. 그는 서둘렀다는 듯 헬멧을 탁탁 쳤다. 2, 3구는 볼. 투수는 좋은 공을 줄 수가 없었다. 볼카운트 1-2. 또 한번의 볼에 또 한번 헛스윙. 휘두르기로 작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볼카운트가 2-2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초구와 비슷한 유인구. 방망이가 허를 찔렸다는 듯 허공을 갈랐다. 세번의 헛스윙. 삼진이었다.

그는 너무나 치려고 달려들었다. '우리'를 잊고 '나'를 앞세웠다. 그가 자신의 타점보다 다음 타자 개리 셰필드의 능력을, 양키스의 승리를 먼저 생각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다'는 욕심이 경기의 흐름, 승부의 추, 나아가 메이저리그 역사를 바꿨다.

그가 삼진으로 물러나 2사 3루가 됐다. 양키스는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분위기가 급변했고 레드삭스의 거짓말 같은 반격이 시작됐다. 그 다음은 너무나 잘 아는 스토리다. 그날 승리로 레드삭스는 다시 살아났고 실링은 6차전 등판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피묻은 양말의 신화가 탄생했다.

올해 미국 스포츠에는 '나'를 앞세운 개인 탓에 무너진 팀들이 교훈을 던져준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국 농구드림팀은 망신 끝에 동메달에 그쳤다. NBA의 화려한 스타군단 LA 레이커스도 팀플레이 위주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무너졌다. 로드리게스가 과욕을 부린 양키스도 그랬다. '나'를 앞세운 개인이 많은 조직. 그런 조직의 최후는 이처럼 비극적이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텍사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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