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논단] 실패로 끝난 인종차별철폐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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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아공 더반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인종차별 문제는 더 이상 인종과 관련한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지놈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종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인종집단에 속하는 개인들의 유전적 차이가 다른 인종의 집단 구성원보다 더 큰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이번 더반 회의에서는 인종차별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이 종족간의 분쟁에서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는 정치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번 회의는 당초 인종간의 반목과 타종족 혐오에 대한 도덕적 해결책을 주제로 할 예정이었지만 엉뚱하게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과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제에 대한 배상문제가 핵심을 차지했다.

1백43개국 대표단과 비정부기구(NGO)회원 중 상당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기에 바빴다.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제기구가 이런 식으로 퇴보한 것은 슬프고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이번 회의에서 아랍권 국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과 유대인에게 모욕을 안기는 것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분쟁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킬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

악의적인 공격만 난무했을 뿐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회의장을 떠난 것도 잘한 일은 아니다. 양국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자존심을 지키면서 반박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심지어 무언의 항의를 표시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번 회의는 아라파트 수반이 계속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강경파들의 입지만 넓혀준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세계 각지의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논의함으로써 인종차별이 보편적 문제이며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겠다는 회의의 본래 취지도 사라졌다.

지구촌에는 쿠르드.체첸.티베트 등 인종적 문제를 겪고 있는 종족이 무수히 많다. 이러한 종족의 대표들이 소개한 각 지역의 독특한 사례들을 모으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을 해소하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노예제 배상문제가 부각된 것도 잘못이다. 도대체 누가 배상금을 지급하고 배상을 받아야 하는가. 미국 등에 있는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 아프리카에 있는 주민들이 배상을 받아야 하는가.

배상금은 노예를 부렸던 사람의 후예들이 내야 하는가, 아니면 현재의 부국에 사는 사람들이 내야 하는가.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배상금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다.

1978년과 93년에 치러진 인종차별철폐회의도 실패했다. 대표단들이 정치적 야심을 관철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될거라면 이 회의는 차라리 정치적 회의라고 표방하는 것이 솔직한 일이다.

플로라 루이스 <칼럼니스트.9월 7일자 기고>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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