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돈보다 물건이 앞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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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레닌은 옳았다. 현존 사회의 토대를 파괴하는 데에 화폐를 타락시키는 것보다 더 교묘하고 더 확실한 수단은 없다. " 레닌이 어디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케인스가 어디에서 이 얘기를 했는지는 알고 있다.

1919년의 저작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었다. 야유든 진심이든 케인스가 레닌을 눈여겨봤다는 점이 나로선 아주 놀랍다.

그 다음으로 놀라운 것은 자칫 돈을 잘못 다스렸다가는 사회가 무너진다는 양자의 공통된 인식이다. 돈이 무언가? 기껏해야 물감 칠한 종이조각인데 그게 사회를 무너뜨린단 말이지?

*** 투기 만능의 세계화 추세

돈은 누구나 다 받는다. 때로는 예수님 말씀이나 부처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어디서든지 받는 그런 기막힌 물건이 있다는 것이 정말 희한하다. 누가 그런 궁리를 비벼냈을까□ 누구나 다 받기 때문에 돈은 무엇이라도 살 수 있다.

화폐의 일차적 기능은 이처럼 실물과의 교환에 있으며, 여기에 고장이 생기면 경제질서가 무너지고 만다. 설익은 경제원론 강의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이 원론의 외면이야말로 지금 세계 경제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돈은 물건의 생산이나 교환을 통해 벌어야지, 돈이 직접 돈을 버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이자를 받는 것도, 증시에서 투기 이익을 챙기는 것도 다 돈이 돈을 버는 행위다.

거기는 모두 그 돈들이 생산과정으로 흡수돼 실물 증대에 기여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전제돼 있다. 이런 전제가 붕괴할 때, 즉 화폐의 세계와 실물의 세계가 단절될 때 우리는 돈이 행사하는 엄청난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돈은 돈대로 놀고, 실물은 실물대로 노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초국적 금융자본은 투기와 투자의 벽을 허물고, 그래서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과 실물생산으로 돈 버는 방법의 차이를 없애버렸다.

돈을 벌어가는 쪽의 계산으로는 어떤 방식이든 하등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돈을 벌어가게 해주는 쪽의 사정은 크게 다르다. 투기로는 소득을 빼앗길 뿐이지만 투자라면 그래도 생산증대의 '고물' 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투기 만능의 세계화 추세를 거역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기 개방 반대가 유효한 대안일 수 없다면 최소한 개방 만세 아닌 '개방 조심' 정도의 합의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내경제로 좁히면 사정이 다르지 않겠느냐는 것이 나의 희망사항이다. 나처럼 '구지식인' 의 눈으로 보자면 종합주가지수 1포인트를 올리는 것보다 쌀 한 가마니나 철강 1t을 늘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의 관심이나 정부의 노력은 그 반대다. 주가가 얼마나 오르고 떨어졌는지는 실시간대로 중계하고 정책 수뇌부가 즉각 관심을 표명하지만 쌀과 철강 생산에 대해서는 그런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돈과 실물에 대한 이런 차별이 나로선 대단한 불만이고, 국가 경제 전반에도 이것은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한다.

명색이 경제 칼럼을 쓰는 나마저 내용을 구분하기 힘든 각종 금융상품이 하루가 멀게 쏟아진다. 돈에 대해, 돈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배알조차 빼버리고 온갖 '아첨' 을 다한다. 그러나 물건 만드는 사람에게는 전혀 딴판으로 규제와 호령 일색이다.

돈은 피와 같아서 고루 잘 돌아야 경제가 튼튼해진다는 말씀을 나도 듣고 있다. 그러나 3백10조원에 - 국내총생산의 60%에 - 이르는 단기 부동자금이 은행으로 갈까, 증시로 갈까, 부동산으로 갈까를 놓고 배부른 흥정을 하는 판에 금융이 산업의 혈액이라는 식의 점잖은 설득은 별 성과가 없을 것 같다.

개발독재 시대처럼 무슨 명령이나 무슨 조치를 통해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돈의 비위만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근을 내놓을 것이란 계산이 섰을 때 돈은 장롱에서 버티지만 결코 당근 따위는 없다는 결심이 알려지면 제 발로 나오게 마련이다. 실질 이자율이 영에 가까운데도 돈을 빌려쓰지 않는 '유동성 함정'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 산업으로 끌어내는 지혜

나는 "재무부가 덜 거만하고 산업부가 더 유능하기 바란다" 는 1925년 처칠의 발언이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집이 있어야 복덕방이 필요하듯이 돈은 생산에 복종해야 한다. 돈에 끌려다니지 말고 돈을 산업으로 끌어들이는 지혜의 발견, 이것이 우리 경제에 보내는 나의 세번째 고언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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