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허스키...이병헌과 따로 노는 일본어 더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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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일본에 와서 새삼스레 이병헌의 팬이 될 위기(?)에 처했다. 21일 오후 9시, 일본 TBS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 ‘아이리스’ 때문이다. 지난주부터 TV만 켰다 하면 이병헌이다. 한국 TV 오락프로에서는 참으로 만나보기 힘든 톱스타였던 이병헌·김태희 두 배우는 아이리스 방영을 앞두고 일본을 방문, TBS의 간판 오락프로인 ‘신스케 사장의 프로듀스 대작전’ ‘핏탄코 캉캉’ 등 거의 모든 프로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침 저녁 생방송 뉴스에 이병헌이 등장한 것은 물론, 오전 시간대에는 이병헌이 주연한 ‘올인’을 특별 방영 중이다. 몇년째 시청률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TBS가 ‘아이리스에 사활을 걸었다’는 게 과장이 아닌 모양이다.

아이리스 첫 회 방송 다음 날인 22일, 마치 TBS 간부라도 된 양 아침 일찍부터 시청률을 체크했다. 결과는 10.1%. 한국에 비해 다양한 채널이 경쟁하고 있어 시청률 20%만 넘으면 ‘대성공’으로 평가되는 일본의 방송계에서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오모테산도를 비롯한 도쿄 중심가 곳곳에 거대한 포스터를 내거는 등,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인 홍보전을 펼쳤던 것에 비하면 TBS로서 만족할 만한 수치는 아닌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드라마가 지나치게 ‘한류팬용’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게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뵨사마’가 주인공, 그리고 역시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신승훈이 부른 주제가 ‘러브 오브 아이리스’, 게다가 일본에서 활동 중인 ‘빅뱅’까지 합류한 ‘한류 종합선물세트’의 이미지가 오히려 일반 시청자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할까.

이병헌 매니저라도 된 양, 인터넷 사이트를 돌며 반응을 확인했다. “스케일에 감탄했다”, “심심하기만 한 일본드라마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 호평이 대부분. 하지만 드라마를 본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더빙이다. 방송 결정 직후부터 자타공인 ‘한 목소리’ 해 주시는 이병헌의 목소리 연기를 과연 어떤 성우가 담당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TBS는 역시나 이례적으로 성우가 아닌 일본의 인기배우 후지와라 다쓰야(‘데스노트’의 라이토 역), 구로키 메이사(‘크로우즈 제로’) 등에게 목소리 연기를 맡기는 ‘모험’을 시도했다. 하지만, 후지와라 다쓰야의 허스키하고 가는 목소리가 이병헌과 영 어울리지 않았고, 후지와라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몰입에 방해가 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런 우려를 예측한 듯 아이리스 방송 도중 다른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막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일본어 자막방송으로도 방영 중이니, 한국어로 듣고 싶은 분들은 자막방송을 선택해 주십시오”라는 내용.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김태희의 외모는 너무 완벽해 개성을 중시하는 일본에선 안 먹힐 것’이라는 혹자들의 예측은 말짱 거짓이었다. 다음 날 만난 일본 친구들에게 “혹시 아이리스 봤니? 어땠니?”라고 물어보니 남자들의 반응이 오히려 폭발적이었다. “여주인공 도대체 누구냐? 너무 예쁘더라”는 찬사일색. 마치 내가 서울대 출신의 최고 신붓감이라도 된 양, 뿌듯한 마음으로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다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아이리스를 보며 ‘왜 그녀는 세 가지 표정으로 천의 얼굴을 연기하는가’ 비꼬았던 이는 누구인가. 나의 착각이었다. 그녀의 연기는 일관성이 있는 것이었을 뿐. 미안하다. 일본 생활 한 달 만에 이렇게 대책 없는 한류 팬이 되어간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의 한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이영희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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