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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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성복(1952~ )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전문

산을 올라가다가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줄까 하다가,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산중턱

뒤집혀 말라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박명(薄明)의 해가 성긴 구름 뒤에서

떨고 있는 겨울날이었다

잘린 바위 틈서리에서 부리 긴 새들이

지렁이를 찢고 있었다

내 괴로움에는 상처가 없고, 찢겨

너덜너덜한 지렁이 몸에는

괴로움이 없었다


괴로움도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눈처럼 코처럼 손처럼 몸에 붙박여 있는 것. 살처럼 억지로 베어낼 수도 없는 것. '찢겨 너덜너덜한 지렁이 몸'처럼 되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 것.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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