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1952~ )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전문
산을 올라가다가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줄까 하다가,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산중턱
뒤집혀 말라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박명(薄明)의 해가 성긴 구름 뒤에서
떨고 있는 겨울날이었다
잘린 바위 틈서리에서 부리 긴 새들이
지렁이를 찢고 있었다
내 괴로움에는 상처가 없고, 찢겨
너덜너덜한 지렁이 몸에는
괴로움이 없었다
괴로움도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눈처럼 코처럼 손처럼 몸에 붙박여 있는 것. 살처럼 억지로 베어낼 수도 없는 것. '찢겨 너덜너덜한 지렁이 몸'처럼 되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 것.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기택<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