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편견이 무서운 고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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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공고 졸업 후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29)씨는 입사 초기 생각지 못했던 난감한 일을 여러 차례 겪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공이 뭐냐”고 묻기에 무심결에 고교 때 전공인 ‘전자과’라고 답했다가 “어느 대학이냐”는 질문이 이어져 말문이 막힌 것이다. 이씨는 “요즘엔 처음부터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고 말해 오해 살 일은 없지만 그때부터 대화가 끊기고 어색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쓴 박대성씨가 체포됐다. 서울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는 “미네르바는 공고를 나와 전문대를 졸업한 30대 무직자”라고 밝혔다. 인터넷에는 “박씨가 미네르바가 아닐 것”이란 주장이 수없이 올라왔다. 공고 나온 백수가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공고 졸업 후 천안의 한 반도체 장비업체에 다니는 최영민(31)씨는 당시 마음앓이를 심하게 했다. 그는 “검찰과 네티즌 모두 공고를 나오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그런 식의 사회적 편견이 고졸자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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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무심코 건네는 말 한마디에 사회적 편견이 숨어 있다. "몇 학번이냐”거나 "전공이 뭐냐”고 묻는 게 대표적이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런 사회 분위기가 더 속상하다. 중앙일보가 전문계고를 나온 직장인 특별과정인 중앙대 글로벌지식학부와 건국대 신산업융합인재양성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51%)이 ‘대학 졸업을 전제로 한 대화가 오갈 때 가장 불편하다’고 답했다.

사회 전체에 깔려 있는 편견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도 고졸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본지는 고졸로 대기업에서 임원·관리자급에 오른 사람들을 접촉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거래처 등 외부에 알려질까 봐 취재에 응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속얘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이름을 밝히기는 꺼렸다. 서울의 한 특급호텔 외식사업부에서 일하는 K씨(30)는 “아내가 원치 않는다”며 익명을 요구했다.

각종 서류에 있는 학력란은 고졸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또 다른 관행이다. 특히 자녀의 학교에서 부모 학력을 물어보는 게 부담스럽다. 소프트웨어 분야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최모(53)씨는 “아이들이 학기 초마다 창피해했다”며 “부모 학력을 알아야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07년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할 때 학생의 인권 보호를 철저히 하라는 공문을 일선 학교에 내려보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학생 생활지도에 필요하다’며 부모 학력을 조사서에 포함시키고 있다. 학력 차별을 철폐하겠다는 정부조차 무심결에 차별 관행을 부추긴다. 지난해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시행한 행정인턴은 대졸이 요건이었다. 공무원과 공기업 신입사원 채용에서는 학력 제한을 없앴지만 정작 인턴에게 대졸 학력을 요구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정 권고를 하자 부랴부랴 고졸 이상으로 수정했지만 고졸자 중 행정인턴으로 뽑힌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명예퇴직 대상에 오를 가능성도 대졸자보다 크다. 보통 고졸자들이 대졸자와 같은 직급에 오르려면 훨씬 긴 기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빨리 진급하지 못하고 같은 직급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을 명퇴 대상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A증권사의 일부 고졸 직원은 2005년 이런 기준에 따라 명퇴 전 단계인 특수영업팀으로 발령을 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기도 했다. 인권위에는 2004년 이후 학력 차별을 시정해 달라는 진정이 190여 건이나 제기됐다.

한·일 양국 회사에서 모두 근무해 본 심영주(27)씨는 "한국 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늘 고졸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일본에 와 보니 아무도 학력을 인식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경총 이광호 책임전문위원은 “학력 차별과 관련한 해외 사례를 연구해 보니 미국·유럽에선 그런 개념조차 없다”고 말했다.

인권위 김은미 차별조사과장은 “장애나 성별·국적 차이와 달리 학력 문제는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 자초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고, 최근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이런 편견이 더 심해졌다”며 “사람을 능력과 자질로 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안혜리·강주안·최현철·김민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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