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소월 '왕십리'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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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로 朔望 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김소월(1902~1934) '왕십리' 중

내가 아는 한 이 시를 가장 구성지게 왼 이는 고(故)한남규 선생이었다. 이호철 선생도 소월 시를 자주 외었지만 그쪽은 주로 "산새도 오리나무…" 였고 '왕십리' 는 역시 한남규본(本)이 으뜸이었다.

안주도 술도 다 떨어져가던 1970년대의 암울한 저녁 무렵, 청진동 실비집 탁자를 두 손으로 짚고 "여드레 스무날엔" 을 읊던 선량한 그의 모습이 그립다.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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