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산해관 잠긴 문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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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백년여 전 한국의 지식인은 중국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를 담은 타임캡슐, 그것이 이 책이다. 연행록(燕行錄), 즉 청대 중국의 수도 연경(燕京.현재의 베이징)을 찾았던 조선의 외교사절이 남긴 기행문학이라는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작업은 그러나 한가한 호사취미 이상이다.

기행문의 틀 속에서 청나라의 변화를 묘사한 이 기록이 당시 일기 시작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짚어내는가를 짚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이 북학파의 지도자 담헌(湛軒)홍대용(1731~1783)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18세기 중후반 연암(燕巖)박지원과 함께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담헌은 책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자신의 내면풍경과 함께 보여준다.

더욱이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그 시기 가장 많이 읽힌 빅3 기행문' 의 하나라는 점에서 신뢰가 간다.

어쨌거나 '고문헌 서고(書庫)의 시렁' 에 얹혀 있던 담헌의 『을병연행록』(20책)을 우리 시대의 훌륭한 읽을거리로 바꿔준 작업은 번역자와 출판사의 공로다.

담헌은 공식 리포트인 한문본과, 문학적 서술의 한글본을 동시에 펴냈는데, 이 책은 한글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본)을 토대로 했다.

고어(古語)의 옛스러움을 살려 단행본 한 권으로 새롭게 선뵌 이 책에서 담헌은 자신이 보려했던 베이징(北京) 천주당 내의 예수상(像)부터 막바로 묘사해 들어간다.

"머리를 풀고 눈을 찡그려 먼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생각과 근심을 담은 모습이다. 이것이 곧 천주(天主)라는 사람이다. 천하에 이상한 화격(畵格)이다" (1백62쪽) 담헌의 묘사를 그대로 빌리면 '천주께 제사할 때 연주하는 풍류' 인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는 직접 건반까지 눌러본 뒤 며칠 뒤 선교사와 필담을 신청한다. 담헌의 질문이 이렇다.

"천주학문이 유불도(儒佛道)와 더불어 중국에 병행한다는데, 동국(東國)사람인 내가 윤곽을 알고 싶다. "

"천주는 상제(上帝)을 가르키는 이름인가. "

그러나 담헌은 서학(西學) 자체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과학기술 쪽에 관심이 많았다. 선교사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망원경.자명종을 관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핵심은 실은 베이징에서 6천리 떨어진 항주땅에서 과거 보러 올라온 엄성(嚴誠)등 세명의 중국선비와 일곱 차례 만나며 주고받은 대담.

책의 절반이 호형호제 하며 담소를 하고 헤어질 때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는 교유로 채워진 내용 때문에 이 책은 근세의 흔치않은 교우록(交友錄)으로 평가된다.

한데 이 대목에서 조선 제일의 실용주의자인 담헌은 유학 제일주의를 뜻밖에도 거듭 설파한다. 불교.도교에 두루 관심이 많은 중국선비들에게 유학만을 강조하는 대목은 지금 책보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탄력을 잃은 사대부의 '완고함' 으로까지 비춰진다.

당시 연행(燕行)은 요즘의 단기 해외유학. 1765년 말 압록강을 건너가며 '오랑캐의 나라 청국' 에 대한 선입견 대신 넓은 땅에서 한수 배우자는 자세로 일관했던 담헌이 그 정도의 시야에 그쳤다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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