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한국 학교위기와 일리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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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980년대 전반은 사회 변혁을 꿈꾸는 교사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한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교사들은 소모임을 만들어 교육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새로운' 교육학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배운 교육학은 우리의 교육현실을 해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교사들이 즐겨 읽었던 텍스트 중의 하나가 일리치의 『탈학교 사회』 였다. (이 책은 70년대 후반에 부분적으로 소개되다가 1984년에 다른 사람의 글과 함께 『탈학교 논쟁』 이란 책 속에 완역되어 실렸다. )

일리치는 이 책에서 학교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학교를 폐지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그는 학교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며, 학교를 대신할 학습네트워크를 구축하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 이상적이고 과격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학교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에 공감하는 교사들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우리 교육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이 학교에 대한 인식을 벼리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우리 교육현실을 개혁할 프로그램이 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교조를 결성하면서 교사운동의 역량의 전부가 조직을 지켜내는 데 집중되었기 때문에 학력사회를 '탈(脫)' 하여 학습사회를 만들자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일 여지가 없었다.

한동안 우리 교육운동 진영에서 일리치의 꿈은 잊혀져 가는 듯했다. 그러다 90년대 말에 탈학교실천연대(최근에 학력폐지연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결성되고 『민들레』 라는 대안교육 잡지가 만들어 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탈학교실천연대를 이끌고 있는 이한은 『학교를 넘어서』 『탈학교의 상상력』 이란 책을 냈는데, 그의 핵심적 생각은 일리치와 별로 다르지 않다. 『민들레』 는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배움의 방식을 소개하는 한편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면서 학교 밖의 공간을 학습의 장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탈학교운동에 대해 교육운동 진영의 일부 그룹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학교의 위기가 가속되고 있는데 탈학교운동이 이런 분위기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가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복지로서의 교육권' 을 실현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학교교육을 내실화하는 데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이에 대해 탈학교실천연대는 복지로서의 교육권을 구현하는 방식이 반드시 학교일 필요는 없으며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교육의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고 대응한다.

일리치의 교육론이 위기에 빠진 한국의 교육에 새로운 전망을 줄 것인지 판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뜻은 좋은데 이상적이고 과격한 것으로 치부되던 일리치의 사상이 현실화하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그의 사상은 분명 과격하다. 그러나 과격해지지 않고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박복선 < '우리교육'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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