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당보조금 실사 '편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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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문제> 다음은 정당이 국고보조금을 잘못 사용한 사례다. '용도외 지출' 과 '허위보고' 가운데 어느 쪽에 해당하나?

①전기요금으로 2천9백20만원을 내고 5천8백40만원으로 부풀렸다.

②준 적도 없는 행사비를 1백만원 줬다고 했다.

③꽃값으로 1천5백20만원만 주고 1천9백50만원 지불로 적었다.

④있지도 않은 음향기기 설치대금으로 2백만원을 장부에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허위보고' 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권해석 권한을 가진 중앙선관위는 '용도외 지출' 이라고 판정했다. 20일 국고보조금 지출내역 실사(實査)결과를 발표하면서다.

①은 한나라당, ②는 민주당, ③은 자민련, ④는 민국당의 위반 내역이다.

답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각 정당이 받게 될 국고보조금은 크게 차이가 난다. '허위보고' 라면 해당연도 국고보조 총액(5백15억원)에서 25%를 삭감한다. 1백29억원이다.

그러나 '용도외 지출' 이면 해당금액의 두배만 감액한다. 위반액이 4천2백만원이니 8천4백만원이다. 선관위는 "허위보고로 판정할 경우 너무 가혹하다" 고 토로했다.

이규건(李圭鍵)홍보관리관은 "허위보고를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지 말아달라" 며 "허위보고는 수차례에 걸쳐, 고의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빼돌린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관위의 판단은 "지나치게 자의적" 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선관위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nec.go.kr)엔 "정당에 약한 선관위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꼬리 내린 선관위가 한심하다" 는 글이 올랐다.

"허위보고는 국고횡령이나 같다. 법대로 하라" 는 주장도 있다. 내용상 오십보 백보 차이의 위반임에도 판정에 따라 삭감금액이 1백29억원과 8천4백만원이라는 천양지차의 결과로 나타난다면 그 조항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선관위는 관련규정인 시행령을 미리 고쳤어야 했다.

관련조항의 취지는 "허위보고는 엄중하게 다뤄야 한다" 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허위보고가 적발되면 엄벌하는 게 법정신에 맞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세금을 낸 국민에게 성실한 해명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엄연한 실정법 위반을 깔아뭉개거나 멋대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선관위가 앞으로 어떤 명분으로 위반행위를 단속할지 궁금하다.

고정애 기자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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