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이념적 색깔 왜 감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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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의 현 정치사회의 특징을 일컬어 이념적인 '혼동과 모순의 시대' 라고 훗날 사학자들은 기술할 것만 같다.

한반도에서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냉전적 사고' 는 죄악시되고 이념공방은 끝이 없다. 국방전략의 기본인 '주적' 개념까지도 시비의 대상이 돼 버렸다. 북측에서는 '김일성주의' 로 '통일전선전략' 을 펴는데 우리측에서는 '이데올로기 종언' 을 구가한다.

*** 죄악시되는 냉전적 사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의 정부 아래인데도 최악의 인권상황을 연출하는 체제와 그 책임자에 대한 비판은커녕 신뢰와 동조의 목소리가 틈틈이 메아리친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의 깃발은 걸려 있는데 '사회주의적' 이니 '색깔론 재연' 이니 하는 공방이 계속된다. 그래서 국민은 이념적 사회균열이 문제인지 국가관리체계가 문제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라와 사회의 정치안정을 위한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고 국정담당자들과 여야정치인에게 있다. 그런데 이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철학적 지향성을 감추고 있거나 아예 정치이념이 무엇인지 몰라 문제만 낳고 있다. 민주다원주의사회란 정부가 어떠한 국정목표를 갖고, 어떠한 정책을 만들어 어떻게 일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국민이 서로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는 사회다.

그런데 한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그래서 미국 혹은 덴마크처럼 극단적인 정치적 이념 대립이 없는 정치문화 환경 속에서는 정치적 안정이 쉬 유지된다.

반대로 극단적 이념갈등이 정치생활화되는 경우(1980년대 중남미 국가들) 나라 정치와 사회는 망가져 간다. 그런데 서구 대부분의 경우 정치이념의 간극은 분명한데도 선진적 정당정치의 제도화를 통해 타협과 협력으로 극복하고 있다.

현재 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덴마크를 비롯한 거의 모든 서구선진국의 집권당(혹은 제1당)은 당명 자체도 '사회주의…당' (영국은 노동당)이며, 정강과 노선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중시한다.

그래서 '중도좌파' 라고 부른다. 이들은 기회의 평등, 노동자의 권익.공익성 등 사회주의적 이상을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것이지, 사회주의의 한 분파로 무산자 혁명을 목표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당(공산당)과는 다르다.

서구 정당들은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는 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이념투쟁' 이 아니라 나라 현실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한 지향성간의 경쟁이 우선이다. 그리고 안정적 정치의 기반은 의회주의와 민주 경쟁적 정당제도의 생활화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우리 상황은 과연 어떠한가□ 최근 한 야당 중진이 현 정부의 경제사회정책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적' 이라 했다가 여당으로부터 '색깔공방' 의 재연이라는 히스테리적 반발을 샀던 해프닝이 있었다.

우리의 현실문제는 국민간의 이념적 간극이 깊어서가 아니라 현실정치와 관련된 소수의 극좌와 극우가 '이념적 표어' 를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화를 위해 남용하면서 국민 분열을 낳고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국가정책 과정에 부합하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성을 전제해 놓을 필요가 있다.

특히 대북정책과 관련해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보편적 가치 지향에 관한 이념적 차별성은 언행일치를 통해 분명해야만 한다. "망해가는 체제와 이념에 왜 동조하겠느냐" 는 일반적 상식과 달리 사회 곳곳에는 '통일' 이상에 몰입돼 '친북' 적 행태를 보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색깔논쟁' 은 과거 반공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정치지도자는 분명해야

결국 우리 사회의 당면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공익보다 사리와 파당적 이익 때문에 상호간의 다른 견해와 입장을 이데올로기 외피를 입혀 서로 파괴하려는 데 있다. 이 모든 책임은 여야의 모든 정치인들이 지역주의와 맹주정치의 틀 속에서 자기 나름의 이념적 색깔을 갖지 못했거나 감추어온 결과다.

그래서 이제는 이념적 색깔을 오히려 분명히 해야만 할 때라는 것이다. 다만 이념적 지향성의 차별화는 정당정치의 선진화와 병행돼야만 한다. 대선정치 계절의 도래에 앞서 대선후보 지망자들은 보다 확실한 '이념적 색깔' 로 국민적 지지 여부의 심판을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金東成(중앙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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