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재벌이라고 다 같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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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규제 완화 차원에서 규제대상 재벌 숫자를 줄인다고 한다. 이 참에 지난 30년 재벌 규제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외환위기 이전에 "재벌규제 왜 하느냐" 고 물으면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서" 라고 했다. "경제력 집중은 왜 막느냐" 고 하면, 솔직한 사람은 "재벌들이 정권에 빌붙어 부당한 방법으로 그 재산을 모으기 때문" , 좀 점잖은 사람은 "재벌들이 그 힘을 악용하지 못하게 해 중소기업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라고 답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재벌규제의 이유가 좀 복잡해졌다. "외환위기의 주범이 재벌들이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재벌이 과도한 빚을 지고 불투명하게 경영한 결과 외환위기가 왔다는 게 설명이다.

재무건전화.투명경영 등 8개의 재벌개혁 과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외환위기를 넘긴 지금, 재벌 규제를 계속해야 하는지 한번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재벌의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이제까지 재벌들을 규제해 온 두 가지 이유, 즉 경제력집중 억제를 통한 '공정경쟁 여건의 조성' 과 재벌개혁을 통한 '투명.책임.건전경영' 노력이 얼마나 진척이 있었는지 따져보기 위해서다.

만일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면 재벌 규제를 계속해야 할 것이고, 진척이 있었다면 그 규제를 풀어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공정경쟁 여건의 조성 여부부터 보자. 덩치 큰 재벌들의 '우월적 지위 남용' 이나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 등은 공정위가 가장 신경을 써 단속해 온 사항의 하나다.

또 부당공동행위나 불공정거래도 공정위의 엄격한 제재 덕분인지 1990년대 말 이후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공정위도 그 20년사의 제호를 당당하게 '시장경제 창달의 발자취' 라고 붙일 정도다.

다음으로 재벌개혁 과제의 추진을 보자.

외환위기 이후 재벌들의 재무구조 개선, 상호지급보증 해소, 핵심부문으로의 집중 노력은 부인하기 힘들다. 적어도 그 극심한 불황 속에서 살아남은 재벌들은 그렇다.

부실경영을 책임져 사재를 털어야 하고 심하게는 감옥에 가야 하며, 사외이사.기관투자가 등의 견제와 감시의 눈이 겁나는 세상이 됐다. 책임.투명경영은 이제 재벌 생존의 기본전제가 된 것이다.

그 결과 '4대부문 개혁의 추진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 이 지금 정부의 최대 업적이 됐다.

따라서 국내외적 경쟁여건의 변화와 재벌들의 투명.책임.건전 경영으로의 발자취를 인정한다면 재벌을 규제해야 할 대부분의 근거가 없어진 셈이다. 구조개혁의 실적보다 재벌 규제가 사라져야 할 더 중요한 이유는 이제는 규제가 아닌 시장과 제도에 의해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할 때가 됐다는 데 있다.

문제는 '모든 재벌' 의 경영이 개선됐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문어발식 경영, 위태로운 재무구조, 전근대적 지배구조에 스스로 발이 묶여 있는 재벌들도 많다는 얘기다.

그러나 부실 재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모든 재벌' 들을 옥죄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자산 규모가 일정액이 넘는 재벌에 한해 규제를 유지하겠다는 정부 발상은 가급적 규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벌간에 엄존하는 경영개선의 차이를 애써 외면하는 처사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벌의 경영개선 유도는 이제 정부 규제가 아닌 시장과 제도의 몫이다. 따라서 재벌지정제도와 이에 근거한 규제는 그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

그러나 행정편의상 꼭 재벌 규제를 계속해야겠다면 그것은(자산액 등) 규모 기준에 의해 모든 재벌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경영의 투명성, 재무구조의 건전성 등) 개별적 경영개선 기준에 의해 해당 재벌에만 적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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