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립 12년 만인 1960년 오늘 ‘신생국’ 대한민국에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186명이 희생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났다. 그 4·19가 50주년을 맞았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서 있다. 반세기 전 민주주의를 외쳤던 10명으로부터 ‘4·19 정신’을 들어봤다.
고정애·백일현·허진 기자
※가나다순, 괄호 안은 당시 신분. ① 4·19 당시 한 일 ②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 ③ 주역으로서 아쉬운 점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성균관대 화학 4년)
①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는데 그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처음엔 두려웠는데 시민들이 환호해줬다. 이후 4·19학생대책위 성균관대 대표로 활동했다.
② 순수하게 부정부패에 대한 변화 요구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 거다.
③ 전엔 학생운동이 순수했는데 요즘은 투쟁하는 걸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니 이젠 국가 발전을 위해 함께 가야 한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동아대 정치학 4년)
① 학교에서 4·19 선언문을 작성하고 그걸 낭독하고 시위에 돌입했다. 내가 직접 쓰고 낭독했다.
② 학생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교육받았는데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컸다. 그것에 대한 저항이란 의미가 크다.
③ 4·19 직후 바로 혁명정신이 수용되는 정권이 들어서야 했는데 민주당이 계파정치에 몰두해 이를 훼손했다
박명수 전 중앙대 총장(중앙대 행정학 4년)
① 지프차를 타고 흑석동에서 부터 광화문까지 갔고, 시위를 통솔했었다. 그날 중대생 6명이 희생됐다.
②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다. 학생뿐 아니라 국민이 나섰다. 민주주의에 하나의 획을 그은 거국적인 운동이고 혁명이다.
③ 혁명을 하고 1년 만에 5·16이 났다. 하지만 오늘 이만큼 누리는 것도 그런 역사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동국대 철학 3년)
① 당시 토론을 많이 했었다. 그날 ‘나가자’는 말에 함께 나섰다. 동국대생 1200~1300명이 모였다.
② 부정·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에 대한 열망, 민족 자주성에 대한 자각, 새로운 시대에 대한 모색이었다. 근대화의 초석이랄 수 있다.
③ 군사독재로 인해 4·19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정립이 이뤄지지 못한 게 아쉽다. 민주주의는 완성품이 아닌 진행형이어야 한다.
안동일 변호사(서울대 법학 3년)
① 당시 경무대 앞까지 갔다. 이후 2월 28일 대구 고교 시위부터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담은 『기적과 환상』이란 책을 쓴 기억이 난다.
② 자유민주주의 초석이었다. 자유·민주·정의·통일이다.
③ 5·16 쿠데타부터 32년간의 ‘군사문화’ 기간 동안 4·19가 너무 잊혀졌다. 헌법 정신에도 3·1운동과 4·19가 두 기둥으로 돼 있는데….
이성근 전 한성대 총장(연세대 정치학 3년)
① 당시 연대 모의유엔총회 초대 의장이었는데 500~600명이 함께 나갔다. 5·16 이후 정치활동 금지 조치 때 연세대에서 나만 당했다.
② 4·19 주도세력은 대학 3, 4학년들로 해방둥이다. 정의감 있고, 우리가 아는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와 달리 선거 부정이 일어나니 화가 났던 거다.
③ 우리가 순진했다. 상황을 다 장악 못 하니 군대가 밀고 들어온 거다.
이세기 전 의원(고려대 정치학 4년)
① 4월 18일 나를 포함, 5곳 학생위원장이 시위를 이끌었다. 내가 선언문을 읽었다. 당시는 부모님에게 하직 인사를 했었다.
② 정권을 띄우는 것도 국민이고, 국민적 열망을 저버리면 그 정권을 삼켜버리는 것도 국민이란 게 4·19 정신의 요체다.
③ 우린 문제 제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선진 민주화·민족통일, 부강한 나라 등 후세대가 이를 완성해야 한다.
이청수 전 KBS 해설위원장(서울대 정치학 2년)
① 문리대에서 4·19 구호를 나에게 만들라고 했다. 당시 정권은 시위대를 용공으로 몰았는데 우린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구호를 외쳤다.
② 5·16이란 반동이 왔으니 성공한 혁명이랄 순 없다. 하지만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고 본다.
③ 아직 지역·이념으로 나뉘어 싸우는 게 안타깝다. 4·19 세대로서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는 찬성한다.
전대열 민주평통 운영위원(전북대 정치학 3년)
① 4월 4일 처음으로 교내에서 시위했다. 당시 고형곤 총장(고건 전 총리의 부친)이 “내가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하겠느냐”고 웃으셨다.
② 부정부패와 민생을 외면한 정권을 타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세계 역사상 드물게 보는 민중혁명이었다.
③ 4·19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신파·구파 나눠서 싸움하는 통에 정권이 약화돼 5·16을 초래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경동고 3년)
① 김주열 사진을 보고 충격 받았고 시위에 참여했다. 중앙고·보성고·서울고·대광고 등과 친목서클이 움직였다.
② 민주주의(신생독립국으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찍 사회적 운동을 경험하고 깨닫게 된 계기였다.”
③ 아직도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두고 너무 정치적 갈등을 빚는다. 이젠 양극화 등 사회 이슈를 해결하는 데 민주주의 에너지의 초점이 맞춰지면 좋겠다.
역사는 4·19를 어떻게 평가했나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무렵
●‘4·19사태’, ‘4·19데모’, ‘4·19사건’도 혼용
‘4월혁명’, ‘ 4·19혁명’, ‘4·19민주혁명’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직후부터 제2공화국까지
● 60년 8월 12일 윤보선 대통령, 취임 때 “거룩한 4월혁명은 대다수 국민의 민권탈환의 금자탑”
‘4·19의거’
●박정희 정부 때 ‘의거’로 규정
● 66년 4·19 6주년 박 대통령 “4·19의거를 통해서 새 역사 창조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4·19혁명’
●김영삼(YS) 정부 이후
● 93년 33주년 YS “4·19혁명은 전 국민이 참여한 운동으로 이제 재평가돼야”
●94년 12월 국가유공자예우법에 ‘4·19의거’→‘4·19혁명’
● 2009년 49주년 이명박 대통령 “(4·19 주역들이) 정권을 안잡아 숭고한 민주 의지가 역사에 더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