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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출발점 ‘1960년 한국의 봄’…4월혁명은 아직도 진행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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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정부 수립 12년 만인 1960년 오늘 ‘신생국’ 대한민국에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186명이 희생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났다. 그 4·19가 50주년을 맞았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서 있다. 반세기 전 민주주의를 외쳤던 10명으로부터 ‘4·19 정신’을 들어봤다.

고정애·백일현·허진 기자

※가나다순, 괄호 안은 당시 신분. 4·19 당시 한 일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 주역으로서 아쉬운 점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성균관대 화학 4년)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는데 그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처음엔 두려웠는데 시민들이 환호해줬다. 이후 4·19학생대책위 성균관대 대표로 활동했다. 순수하게 부정부패에 대한 변화 요구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 거다. 전엔 학생운동이 순수했는데 요즘은 투쟁하는 걸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니 이젠 국가 발전을 위해 함께 가야 한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동아대 정치학 4년)

학교에서 4·19 선언문을 작성하고 그걸 낭독하고 시위에 돌입했다. 내가 직접 쓰고 낭독했다. 학생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교육받았는데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컸다. 그것에 대한 저항이란 의미가 크다. 4·19 직후 바로 혁명정신이 수용되는 정권이 들어서야 했는데 민주당이 계파정치에 몰두해 이를 훼손했다

박명수 전 중앙대 총장(중앙대 행정학 4년)

지프차를 타고 흑석동에서 부터 광화문까지 갔고, 시위를 통솔했었다. 그날 중대생 6명이 희생됐다.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다. 학생뿐 아니라 국민이 나섰다. 민주주의에 하나의 획을 그은 거국적인 운동이고 혁명이다. 혁명을 하고 1년 만에 5·16이 났다. 하지만 오늘 이만큼 누리는 것도 그런 역사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동국대 철학 3년)

당시 토론을 많이 했었다. 그날 ‘나가자’는 말에 함께 나섰다. 동국대생 1200~1300명이 모였다. 부정·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에 대한 열망, 민족 자주성에 대한 자각, 새로운 시대에 대한 모색이었다. 근대화의 초석이랄 수 있다. 군사독재로 인해 4·19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정립이 이뤄지지 못한 게 아쉽다. 민주주의는 완성품이 아닌 진행형이어야 한다.

안동일 변호사(서울대 법학 3년)

당시 경무대 앞까지 갔다. 이후 2월 28일 대구 고교 시위부터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담은 『기적과 환상』이란 책을 쓴 기억이 난다. 자유민주주의 초석이었다. 자유·민주·정의·통일이다. 5·16 쿠데타부터 32년간의 ‘군사문화’ 기간 동안 4·19가 너무 잊혀졌다. 헌법 정신에도 3·1운동과 4·19가 두 기둥으로 돼 있는데….

이성근 전 한성대 총장(연세대 정치학 3년)

당시 연대 모의유엔총회 초대 의장이었는데 500~600명이 함께 나갔다. 5·16 이후 정치활동 금지 조치 때 연세대에서 나만 당했다. 4·19 주도세력은 대학 3, 4학년들로 해방둥이다. 정의감 있고, 우리가 아는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와 달리 선거 부정이 일어나니 화가 났던 거다. 우리가 순진했다. 상황을 다 장악 못 하니 군대가 밀고 들어온 거다.

이세기 전 의원(고려대 정치학 4년)

4월 18일 나를 포함, 5곳 학생위원장이 시위를 이끌었다. 내가 선언문을 읽었다. 당시는 부모님에게 하직 인사를 했었다. 정권을 띄우는 것도 국민이고, 국민적 열망을 저버리면 그 정권을 삼켜버리는 것도 국민이란 게 4·19 정신의 요체다. 우린 문제 제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선진 민주화·민족통일, 부강한 나라 등 후세대가 이를 완성해야 한다.

이청수 전 KBS 해설위원장(서울대 정치학 2년)

문리대에서 4·19 구호를 나에게 만들라고 했다. 당시 정권은 시위대를 용공으로 몰았는데 우린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구호를 외쳤다. 5·16이란 반동이 왔으니 성공한 혁명이랄 순 없다. 하지만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고 본다. 아직 지역·이념으로 나뉘어 싸우는 게 안타깝다. 4·19 세대로서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는 찬성한다.

전대열 민주평통 운영위원(전북대 정치학 3년)

4월 4일 처음으로 교내에서 시위했다. 당시 고형곤 총장(고건 전 총리의 부친)이 “내가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하겠느냐”고 웃으셨다. 부정부패와 민생을 외면한 정권을 타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세계 역사상 드물게 보는 민중혁명이었다. 4·19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신파·구파 나눠서 싸움하는 통에 정권이 약화돼 5·16을 초래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경동고 3년)

김주열 사진을 보고 충격 받았고 시위에 참여했다. 중앙고·보성고·서울고·대광고 등과 친목서클이 움직였다. 민주주의(신생독립국으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찍 사회적 운동을 경험하고 깨닫게 된 계기였다.” 아직도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두고 너무 정치적 갈등을 빚는다. 이젠 양극화 등 사회 이슈를 해결하는 데 민주주의 에너지의 초점이 맞춰지면 좋겠다.


역사는 4·19를 어떻게 평가했나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무렵
●‘4·19사태’, ‘4·19데모’, ‘4·19사건’도 혼용

‘4월혁명’, ‘ 4·19혁명’, ‘4·19민주혁명’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직후부터 제2공화국까지
● 60년 8월 12일 윤보선 대통령, 취임 때 “거룩한 4월혁명은 대다수 국민의 민권탈환의 금자탑”

‘4·19의거’
●박정희 정부 때 ‘의거’로 규정
● 66년 4·19 6주년 박 대통령 “4·19의거를 통해서 새 역사 창조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4·19혁명’
●김영삼(YS) 정부 이후
● 93년 33주년 YS “4·19혁명은 전 국민이 참여한 운동으로 이제 재평가돼야”
●94년 12월 국가유공자예우법에 ‘4·19의거’→‘4·19혁명’
● 2009년 49주년 이명박 대통령 “(4·19 주역들이) 정권을 안잡아 숭고한 민주 의지가 역사에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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