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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원래 이 깃발에 쓰여져 있는 문장은 손자(孫子)가 그의 병법에서 설파하였던 유명한 내용을 빌려온 것이었다.

손자는 그가 쓴 병법의 '쟁편(爭篇)'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행동에 신속함은 바람과 같고, 그 더딘 움직임은 숲 속과 같고, 침략하고 약탈하는 행동은 불길과 같으며,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고, 속을 알 수 없는 것은 음양의 변화 같고, 움직임은 벼락 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難知如陰陽 動如雷霆). "

손자의 이 유명한 내용에서 14자를 따와 만든 '어기' 는 대대로 다케다 가문의 상징이 되었으며 실제로 이 깃발을 든 다케다의 무적 기마군단은 펄럭이는 곳마다 벼락을 치듯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무찔러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쓰요리는 어기를 군사를 이끄는 선봉장에 넘겨주었으며 자신은 또 하나의 가보인 갑옷 앞에 맹세했다.

이 갑옷 역시 다케다 가문의 조상이었던 신라사부로가 직접 입던 갑옷이었는데 대대로 다케다 가문의 그 가신들은 이 갑옷 앞에서 맹세한 것은 절대로 어기면 안된다고 신성시해오던 신기(神器)였던 것이었다.

이들은 그 갑옷 앞에서 승리를 얻어 천하를 제패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신라사부로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빛나는 다케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나서 가쓰요리는 '다테나시(盾無)' 라 불리는 갑옷을 착용하였다. 이 갑옷은 붉은 색이었으므로 착용하여 입으면 온몸이 태양처럼 불타오르고 선혈의 붉은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다케다 군단에서 가장 용맹한 군사는 아카조네(赤備)라고 불리던 기마군단이었는데 이는 기마군병 모두가 가보를 모방한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붉은 갑옷을 입은 기마군단들은 다케다 군단에서 선봉대를 맡아보던 군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은 붉은 갑옷을 입은 기마군단을 보기만 해도 혼비백산하여 무너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1575년 5월.

나가시노에서는 천하통일을 노리는 일대 회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건곤일척의 운명적인 결전은 의외로 쉽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무적의 다케다 기마군이 비참하게 패배하고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무적의 기마군단을 능가하는 신출귀몰한 무사군단이 새로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인간이 아닌 신식무기의 출현 때문이었다.

3년 전의 전쟁에서 비참한 패배를 맛본 오다는 절치부심하여 무적의 기마군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조총(鳥銃)뿐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무렵 '뎃포' 즉 철포(鐵砲)라고 불리던 조총은 이미 일본에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수입되어 들어와 있었고 실제로 작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 신식무기가 살상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산간 내륙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다케다 가문은 자연 영토 내에 바다를 갖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중앙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다는 외국과의 교역을 추진하여 자기 군단을 신식무기로 급속도로 무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다는 대량의 조총탄약을 조달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영토의 생산력이 높아서 많은 농민들을 농촌에서 떼어내 보병대를 상비할 수 있는 인적자원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오다는 조총을 삼단식(三段式)으로 일제 사격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세계 전략사상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조총은 한번 발사하고 나면 다시 탄약을 장전할 때까지 일정한 시간이 요구되므로 민첩한 기마군단의 신속성을 저지할 수 없었는데 오다는 조총사격을 세단계로 나누어 시간차 공격을 계속하여 잠시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다케다의 무적 기마군단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소설 최인호

그림 : 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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