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사람] 국악인 이태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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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구 달서구 신당동 신당초등교 인근 ‘사물마당’.

방음장치가 된 지하문을 밀고 들어서면 20여평의 공간에 북 ·장구 등이 가득하다.금방이라도 신명나는 굿거리 ·자진모리 가락이 펼쳐질 듯하다.이곳이 젊은 국악인 이태원(李泰源 ·32)씨의 주 활동무대다.

李씨는 이곳에서 초·중 ·고생,주부 ·직장인 등 1백여명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친다.그는 “사물이 목숨을 걸 만큼 매력적”이라 할 정도로 사물에 미쳐 있다.

그는 원래 서양악기를 다뤘다.중3때부터 기타를 쳤고 고교때는 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연주했다.‘정상적인 생활’을 요구하던 부모님이 몇개의 기타를 부수는 등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고3이던 1987년말 우연히 선배를 따라 비산농악회를 방문한 것이 그의 ‘재능’에 불을 붙였다.“장난 삼아 두드려 본 장구 울림이 길을 바꿔 놓을 줄 몰랐습니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그는 장구·꽹과리를 두드렸다.처음에는 피아노를 잘 쳤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려니 생각했다.

갈수록 사물에 심취한 그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시험때는 후배에게 시험을 대신 치도록 하고 전국의 공연을 쫓아다녔다.

덕분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달구벌예술제 ·대가야문화제 등에서 많은 상을 탔다.대학은 7년만에 겨우 졸업했다.

그는 “어떻게 밥벌어 먹고 사느냐”는 회의가 생겨 6개월간 사물을 쳐다보지 않은 적도 있었다.그러나 대학졸업 1년을 앞두고 독립을 결심했다.93년 ‘사물마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업’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노력의 결과는 헛되지 않았다.98년에는 사물마당 등 4개의 동호인팀으로 대구풍물단을 구성,대표를 맡게 됐다.

99년 대구시무형문화재 2호인 날뫼북춤과 4호인 천왕메기굿 등을 전수받은 그는 활동폭을 더욱 넓혀 나갔다.

동아 ·대백문화센터,북구청소년회관 ·성서농협 등의 강사로 나선 것이다.남을 가르치며 우리 것을 전파하자는 욕심도 생겼다.

적은 강사료에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자치단체 주최의 공연 등에 출연하며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단순히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문화 주체성이 없어지는데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빠른 흑인음악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장구를 가르치면 자꾸 리듬이 빨라집니다.”

그래서 사물에 맞춰 청소년들에게 ‘힙합’을 추도록 하고 대금 ·가야금 등으로 만화영화 주제가를 연주하는 공연을 시도한다.개량악기를 동원하기도 했다.우리의 전통악기에 가장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고 시도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공연준비 등으로 새벽에 집을 나서 밤늦게 귀가하지만 그는 토 ·일요일에는 어김없이 아내(29)와 딸(3)을 위해 봉사한다.

황선윤 기자

◇약력

▶1969년 대구 출생

▶87년 칠곡 동명고 졸업

▶93년 사물마당 창단

▶94년 경산대 한문학과 졸

▶98년 사물마당 청소년풍물단 ·대구풍물단 창단

▶99년 날뫼북춤 ·천왕메기굿 전수,대백 ·동아문화센터 등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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