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워치] 사마란치 '어두운 후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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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제8대 위원장으로 벨기에인 자크 로게를 새로 선출했다. 정형외과 의사인 로게는 요트 선수로 올림픽에 세차례 출전한 경험이 있으며, 스캔들에 휘말린 적 없는 청렴.온화한 성격에 인간미있는 신사로 알려져 있다.

또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어학능력에 사교성까지 갖춰 타고난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로게는 전임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와 비교하면 경량급(輕量級)이다. 로게는 사마란치가 자신의 장래를 고려한 '선택' 이라는 설(說)도 있다. 1980년 IOC 위원장이 된 사마란치는 21년 동안 재임하면서 세계 스포츠의 제왕(帝王)으로 군림해 왔다.

이번에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종신 명예위원장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이용해 앞으로도 계속 IOC를 요리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사마란치라는 인물은 선과 악의 극단적 이미지를 공유한다. 올림픽을 살린 구원자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상업주의.부패 스캔들.독재로 올림픽을 훼손한 장본인이라는 이미지도 함께 갖고 있다. 사마란치 취임 당시 올림픽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서방 국가들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올림픽은 분열 위기를 맞았다. 재정적으로도 파산직전이어서 IOC의 은행계좌엔 겨우 50만달러가 남아 있었다.

모스크바 올림픽 다음에 치러진 LA 올림픽도 반쪽 대회였다. 이번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불참했다. 그러나 LA 올림픽은 IOC를 살려줬다. LA 올림픽은 2억1천5백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비결은 철저한 상업주의.

TV 중계권료.공식 스폰서료 등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그후 올림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으며, 세계 각 도시는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IOC가 보유한 자산만도 3억5천만달러에 이른다.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사마란치는 IOC를 사물화(私物化)했다. 현재 IOC 위원 1백22명 가운데 1백9명이 사마란치 재임 중 임명된 사람들이다. 85년 IOC 위원장의 정년을 72세에서 75세로 연장한데 이어 95년 다시 80세로 연장했다.

사마란치가 IOC 위원장을 물러난 지난 16일은 자신의 81회 생일이었다. 이번에 사마란치가 IOC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그 아들이 새로 IOC 위원에 임명된 것은 연고주의의 전형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신임 IOC 위원장 로게는 도핑(금지약물사용) 박멸과 올림픽 규모 축소를 우선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사마란치 노선과 배치되는 데 문제가 있다. 선수들이 도핑을 감행하는 것은 올림픽에서의 승리가 곧 돈이기 때문이다.

올림픽대회 규모가 비대해진 것도 돈을 더 벌기 위한 것이다. 로게의 성공 여부는 사마란치가 남긴 부(負)의 유산인 상업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마란치 노선 계승을 선언한 로게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우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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