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양희은 '아침이슬' 처럼 영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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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노래에도 팔자가 있고 생명이 있지요. 요즘 나오는 많은 노래들처럼 두세달 만에 잊혀지는 곡이 있는가 하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살아 움직이는 노래가 있어요. 근데 노래에 그런 생명을 부여하는 건 작곡가나 가수가 아닙니다. 부르고 기억하고 되새김질하는 대중에 의해 노래의 생명력이 결정되는 것 아니겠어요. "

1952년생. 가수 양희은씨는 이제 쉰살을 바라보고 있다. 노래 '아침이슬' 은 71년생이다. 열아홉살 대학 신입생 시절, 그녀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아 이제 서른살이 됐다.

유신 이후 피와 땀과 눈물로 흘러온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아침이슬' 은 남아 지금도 우리 주변에 살아 있다. 아픈 현장에서 피눈물로 불리던 노래가 이제 노래방에서 술취한 목소리에 담겨 나온다고 서운해 할 일도 아니다. 양씨의 말대로 노래의 팔자와 생명은 대중이 결정하는 것. 30년 동안 많은 이들을 위로해온 팔자가 장하다.

"건강합니다. 열정과 의욕은 20.30대 때보다 오히려 더 큰 것 같아요. "

비가 내리는 일요일(22일)오전 만난 양씨는 건강에 대한 염려를 기운찬 목소리로 일축했다. 세월이 흘러도 좀체 변하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 한번도 말끝을 흐리는 법 없이 똑똑 부러지게 맺고 끊는 달변. 확신에 찬 어조.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재수하던 70년 서울 YWCA가 운영하던 청소년 쉼터 '청개구리' 에서 김민기씨 등 가수와 라디오 PD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YWCA활동을 했어요. 의자도 탁자도 없고 맨바닥에 주저앉아 노래하고 이야기 하던 곳이죠. 입장료로 1백원을 내면 1원을 거슬러주던 그 곳에서 노래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

서강대 사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그녀의 노래 솜씨에 반한 PD들의 권유로 취입한 첫 음반이 바로 '아침이슬' 이다.

"재수 시절 김민기씨가 부르던 그 노래를 듣고 반했지요. 데뷔 앨범에 자연스레 들어가게 됐어요. "

그때 같이 들어간 노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과 '세노야' 다. 그녀의 대표곡을 세곡만 꼽으라면 아마 이 노래들이 아닐까. 데뷔곡이 대표곡이 된 것이다.

"솔직히 어깨가 무거웠죠. 첫 노래보다 더 좋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

그녀는 그런 부담을 지운 노래로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 을 꼽았다. 85년에 발표한 이 노래가 대중의 입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90년. 미국에 터를 잡은 남편과 결혼해 한국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음반사에서 '또 이런 어두운 노래냐' 며 별다른 홍보도 없이 접은 앨범이고 노래였거든요. 그런데 그 노래가 다시 살아 돌아오더군요. 별다른 계기도 없었어요. 정말 이럴 수가 있구나 싶었어요.

학비가 없어 세번을 휴학한 끝에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세 딸을 키우다 사업에 망해 어려워하던 어머님과 두 여동생의 생활비와 학비를 버느라 온갖 고생을 하고, 많은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고 하던 20.30대의 어려움을 비로소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됐지요. 그때 '아침이슬' 에 대한 부담도 사라졌습니다. "

그녀는 71년 데뷔하던 해 가을 기독교 방송의 '해프닝 코너' 를 시작으로 동양방송의 '양희은의 팝스 다이얼' 등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줄곧 활동해왔다. 미국에 머문 7년을 제외하면 그녀는 언제나 라디오와 함께 했다. 요즘은 MBC 라디오 '여성시대' 를 진행 중이다.

"전 우리나라가 망가지지 않는 게 오피니언 리더들 덕분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편지를 쓰고 엽서를 보내는 보이지 않는 청취자들, 그들이 이 나라를 지탱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노래는, 대중가요는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야죠. "

미국 생활을 마치고 93년 귀국한 그녀는 이후 본격적으로 소극장 콘서트에 나섰다. 그녀의 공연마다 객석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가득 찬다.

"1회용 휴지가 아니라 늘 빨고 다려서 소중히 하는 손수건 같은 노래, 그런 가수가 돼야죠. 많은 팬들이 그런 가수에 대한 '의리' 를 버리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93년 이후에만 다섯장의 앨범을 내며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그녀는 올해에도 기념할 만한 일을 한다. 우선 그동안 불렀던 곡 가운데 가장 사랑받은 스물두곡을 다시 불러 베스트 앨범을 낼 계획이다. 새 노래들을 담은 신보도 발표한다. 8월 31일부터 3일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도 한다. 1588-1555.

그녀는 "신보에 '나 떠난 후에라도' 라는 곡이 들어간다. 죽은 뒤에도 기억되고 사랑받는 노래를 남긴 가수가 되고 싶다" 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글=최재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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