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피겨는 마음을 표현하는 아바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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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을씨의 개인전 ‘여기…새가 있느냐?’는 수백 개 인형과 액션피겨를 작가의 분신처럼 사용했다. [갤러리 공명 제공]

인형, 구슬, 액션 피겨….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벌인 듯 자질구레한 장난감이 수백 개 늘어섰다. 서울 신문로 2가 스페이스 공명(02-730-5850). 작가 김을(56)씨는 “이건 내 눈물”이라며 새끼손톱만한 모형을 만지며 웃었다. 날개를 가득 실은 트럭도, 머리에 이것저것 쑤셔 넣은 인형도 관람객에게 뭔가 말을 거는 듯 다정해 보인다.

지난 5년 동안 여러 나라 벼룩시장에서 사 모은 잡동사니를 이리저리 맞추며 이야기를 만든 그는 “이들은 모두 내 분신이자 조수이며 아바타”라고 말했다. 6월 5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여기…새가 있느냐?’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50대 중반에 다다른 이름 없는 한 화가가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중얼거린 짓”이다. 대상이 된 물건(오브제)을 이리저리 맞춰가며 이야기를 만들 때는 무한지경으로 빠져들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무의미하다. 인형과 액션 피겨는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을 읽도록 도와주는 또 다른 물감이자 붓이다.

강익중씨가 자신의 ‘3인치 작은 그림’ 곳곳에 오브제를 붙여 완성한 ‘해피 월드’. “내가 아는 것을 아무리 적어보아도 A4용지 한 장뿐이더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갤러리 현대 제공]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강익중(50)씨 또한 모처럼 서울에서 여는 개인전에 다양한 오브제를 엮어놓았다. 5월 2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02-2287-3500)에서 열리는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는 항아리, 인형, 재활용 나무토막, 작가가 창안한 ‘가로세로 3인치 작은 그림’ 등이 작품 재료로 변신한 현장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 등 작가가 일상에서 깨달은 말들을 크레용으로 적어나간 ‘내가 아는 것’은 한글 나무딱지가 오브제로 번식하며 벽화가 된다. 주먹만한 항아리 1392개가 오글거리며 원을 이루고 있는 화랑 한바닥도 장관이다.

“쉬운 것, 편한 것이 점점 좋아지더군요. 내 안에 있는 순수, 당당, 유연을 무심히 내보이는 작품 말이죠. 언제 그리고, 언제 마치느냐, 즉 포기하느냐가 중요하죠. 부족할 때 내려놔야죠. 그림에 빠져들면서도 거기서 나와야 하는 순명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강익중씨는 아이가 쓰던 장난감이나 생활 주변에서 구한 물건을 ‘3인치 작은 그림’ 곳곳에 배치한 ‘해피 월드’ 앞에서 이것저것 눌러보고 만져보며 “다 추억이 있죠”라며 재미있어했다. 강씨도 김을씨처럼 자신의 사변을 풀어나가는 분신이자 조수로서 그들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내건 전시제목 ‘여기…새가 있느냐?’와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는 어딘가 닮은꼴이다. 삶과 세계를 더 큰 눈으로 바라보게 된 두 작가가 통한 것일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모형은 무심해 보였지만 때로 영혼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김을씨 전시장에는 구석 어딘가에 관람객 생각을 꿰뚫어 보는듯한 인형 하나가 우리를 바라본다. 그를 찾아보시라.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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