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경제] 세이프가드 발동 왜 문제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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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최근 미국의 철강정책을 둘러싸고 국제적인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자기 나라의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각국의 철강산업이 타격을 받게 됐으며, 자칫 무역전쟁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요. 발단은 지난 6월 4일 발표된 미국 부시 대통령의 성명이었습니다.

미국의 철강산업이 외국산 철강 수입으로 인해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로 하여금 조사토록 하겠다는 내용이었지요. 두 주쯤 지난 25일에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공식적으로 ITC에 피해조사를 요청함으로써 논란이 본격화했습니다.

이 '조사' 는 단순히 조사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여 문제입니다. 많은 전문가는 조사가 끝난 후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어요. ITC는 자국의 철강업계가 철강재 수입 증가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을 가능성이 크고, 그 결과 긴급하게 철강 수입을 제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에 철강제품을 수출하는 나라들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이 때의 '긴급수입제한' 을 세이프가드(safeguard)라고 말합니다.

미국은 1974년 통상법을 개정하며 201조에 이같은 세이프가드를 명시했답니다. 그래서 그냥 '201조' 라고도 불립니다.

미국의 철강기업들은 이후 수 차례 이 201조의 도움을 받았어요. 스테인리스 제품은 76년부터 3년간, 또 83년부터 4년 동안 수입이 제한됐었지요. 지난해에도 선재(5~9㎜의 얇은 강관)와 라인파이프 제품에 대해 201조를 발동한 적이 있답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아주 예외적이에요. 예전에는 업계나 기업에서 조사를 요청하더라도 대통령은 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이 보통이었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통령이 직접 조사를 요청한 것입니다.

또 특정 몇몇 제품만을 대상으로 조사하거나 수입을 규제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모든 철강제품이 조사 대상에 올라 있어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뭐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201조 발동 대상 제품이 과거보다 훨씬 많아질 수 있다는 사실에 세계 철강업계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왜 이렇게 강경한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요. 최근 몇년 동안 미국 철강기업들의 경영사정이 어려워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예요.

미국은 세계 최대의 철강 소비국입니다. 연간 1억1백만t을 생산하는 세계 3위의 생산국이지만 워낙 소비가 많다 보니 전체 소비량의 4분의 1 가량은 수입해 써왔습니다.

그런데 97년 이후 세계 철강업계는 난관에 직면하게 됐어요. 주요 기업들이 철강 생산을 늘리기 위해 앞다퉈 시설을 확장해왔거든요. 이 바람에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는 현상이 심해졌습니다.

미국의 철강산업 연구소인 월드스틸다이내믹스(WSD)는 올해 세계 철강 수요는 8억8천4백만t인데 비해 생산능력은 10억2천2백만t에 이른다고 추정하고 있지요.

또 세계 경기가 둔화하기 시작하자 세계 각국의 철강업체마다 수출로 돌파구를 찾겠다며 미국으로 향하는 현상도 생겨났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철강 수입량은 96년 3천만t에서 98년에는 4천만t을 넘어섰어요.

당연히 미국 철강업계는 사정이 나빠졌지요. 경쟁력이 떨어지는 미국의 철강기업들은 도산위기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97년 12월 이후 미국에서는 16개 철강업체가 문을 닫았고 1만5천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부시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성명 발표에는 그 이면에 정치적 이유가 숨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미국 철강업계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하답니다. 수십명의 상원.하원의원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한 연구기관에서 추정했을 정도니까요.

지난해 말부터 철강업계는 지속적으로 미국 정부에 201조를 발동하라는 압력을 가했답니다. 부시 대통령은 결국 세이프가드 발동을 가져올지도 모를 피해 조사를 지시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철강업계나 자국산업 보호를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에게서는 환영을 받겠지만 대신 세계경제의 리더인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를 획책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포스코 경영연구소 이윤희 연구위원은 "세이프가드는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최후의 조처인데 미국 대통령이 직접 조사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고 분석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고, 각국이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있어 앞으로 세계 무역분쟁이 심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재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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