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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황장엽씨 방미라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헨리 키신저는 최근에 출판한 『미국은 외교정책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책에서 국내정치가 대외정책의 발목을 잡는 현실을 이렇게 불평했다.

"미국 외교는 장기적인 전략을 필요로 하는데 불행하게도 국내정치가 외교를 그것과는 반대방향으로 몰고간다. 의회는 입법을 통해 외교의 전술까지 규정할 뿐 아니라 수많은 제재수단으로 남의 나라 행동거지까지 통제하려고 한다. 행정부는 다른 정책을 승인받고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의회의 그런 참견에 굴복한다. "

황장엽(黃長燁)씨의 증언을 듣겠다는 공화당의 보수.강경파 의원들의 한국정부 압박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부시 행정부가 그들의 압력에 굴복한다면 이 문제는 한.미관계에 쓰린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크다.

***兩國관계 상처 남길 우려

지난해까지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제시 헬름스, 하원 외교위원장 헨리 하이드, 정책위원장 크리스토퍼 콕스의 반공보수 3인방이 무례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황장엽씨를 데려가려는 것은 북한의 실상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4년 전에 탈북한 황장엽씨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새로운 정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정부의 협력으로 미국 정보기관들은 그에게서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 그는 인터뷰와 글과 책으로 자신이 아는 북한 실상을 다 털어놓았다. 김정일(金正日)에 관해서도 그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한국의 대북정책 담당자들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일행보다 더 아는 게 있을까.

미국 의회의 반공투사들은 정보가치 보다는 선전을 위한 상품가치 때문에 황장엽씨를 불러가려고 한다. 그들은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주체사상의 대부' 의 입을 빌려 북한의 참상을 재탕(再湯)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미국인들의 적개심을 자극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완화기미를 보이는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강경의 말뚝에 붙들어 매고 미사일 방어망 등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미국에서 황장엽씨의 의회증언, 언론 인터뷰, 강연,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망명소동은 북한 죽이기의 좋은 굿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북한은 중유(重油)도 쌀도 비료도 지원해서는 안되는 불량국가, 공존할 수 없는 타도 대상으로 매도될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한다는 페리 보고서에서 출발한 포용정책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진지한 북.미대화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신변보호가 못미더워 황장엽씨를 보내지 못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입장은 궁색하고 어리석다. 키신저가 말했듯이 의회의 요구가 강력하면 행정부는 특수신분의 증인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지금 단계의 미국의 대북정책과 한국의 햇볕정책으로 봐서 북한을 극도로 자극할 게 확실한 황장엽씨의 미국 의회증언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어야 한다.

장승길이라는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한 것은 1997년이다. 미국정부는 지금까지도 한국정부 관리의 장승길 면담을 거절하고 있다. 하위급 관리의 접근만 한번 허용했을 뿐이다. 한국의 국회의원 몇사람이 보좌관들을 워싱턴에 파견해 장승길을 서울로 초청하겠다고 하면 미국정부가 들어줄 것 같은가.

***남북.북미관계 고려해야

황장엽을 보내지 않으면 하원이 그의 증언을 촉구하는 만장일치의 결의안을 채택하겠다는 헬름스.하이드.콕스 등의 태도는 주권국가에 대한 오만한 협박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어 황장엽씨를 보내지 말자는 게 아니다. 金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생각하면 앞으로 반년 사이에 예상되는 남북관계의 진전에 남북관계 전체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황장엽씨의 인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특별관리를 받는 특수신분의 탈북자다. 전쟁방지를 위해 귀순했다던 그는 '북한 해방운동' 으로 슬그머니 방향을 바꿨다. 미국 의회 증언을 포함한 그의 활동은 당연히 제한받아야 한다.

정부는 햇볕정책으로 실의(失意)에 빠졌을 고령의 망명객의 자존심 하나 살려주지 못한 태만을 반성하면서 미국 의회의 보수.반공원리주의자들과 부시 행정부에는 남북, 북.미 관계의 현단계에서의 황장엽씨 증언은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다방면으로 꾸준히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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