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명숙 무죄 … 검찰 할 말 없게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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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6·2 지방선거, 국무총리 출신으로 야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 뇌물수수 의혹…. 시기·인물·혐의에서 이 정도로 무게감 있는 사건이라면 의사가 정확히 환부만을 도려내듯 정치(精緻)하게 접근하는 게 수사의 대원칙이다. 쓸데없는 논란이 일지 않도록 결정적 물증을 잡고 실체적 진실을 정공법으로 파헤쳐야 한다. 정치판을 요동치게 할 만한 민감한 사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는 무리한 수사로 1차 판가름 났다. 부실수사라는 비판에 검찰은 할 말이 없게 됐다.

법원은 어제 한 전 총리에게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줬다는 진술은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곽씨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선 “일관성, 합리성,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했다. 우회적이지만 ‘강압수사’ 부분까지 지적했다. 공기업 사장 청탁 등 나머지 정황증거는 아예 배제했다. 곽씨의 자백에 전적으로 매달린 검찰의 공소사실이 깡그리 부정된 것이다. 뇌물수수 사건의 특성상 돈을 주고받는 행위가 은밀하게 이뤄져 규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검찰의 허술한 수사가 망신만 자초한 셈이 됐다. “곽씨의 노회한 놀음에 당했다”는 검찰 내부의 자성이 있지만 뒤늦은 후회다.

검찰은 선고일을 하루 앞두고 한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라는 새로운 의혹을 던져 또 다른 논란을 빚고 있다. 당장 야권은 판결에 심리적 영향을 주려는 궁색한 시도이자 ‘별건(別件)수사’라고 공격하고 있다. 검찰은 “새로운 혐의가 나왔다”며 ‘신건(新件)수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모양새가 매끄럽지 못하다. 그에 대한 본격 수사는 선고 후로 미루는 게 올바른 수순이었다고 보인다. 별건 수사는 피의자의 주된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면 이와 무관한 다른 혐의로 확대하는 비정상적인 수사방식으로, 가급적 피해야 한다. 김준규 검찰총장도 지난해 “신사다운 수사”를 주문하며 이를 금지했다. 오죽했으면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까지 나서 “검찰이 왜 이렇게 졸렬한 짓을 하는가”라고 질타했겠는가.

검찰은 뇌물사건 무죄 판결로 또 한번 신뢰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아직 상급심이 남아있어 1심 판단이 뒤집힐 여지는 여전히 있다. 새롭게 제기된 불법 정치자금 의혹도 그냥 덮어둘 수 없는 일이다. 기존의 뇌물사건 유·무죄 판결과 상관없이 수사하는 게 원칙적으로 맞다. 법대로 불법이 확인되면 기소하고, 혐의가 없으면 털어주는 게 순리다. 하지만 이번 무죄 판결을 만회하려고 먼지떨이식 수사나 보복 수사로 몰아가서는 결코 안 된다.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고려도 금물이다.

이번 수사를 놓고 일각에선 “검찰이 야당을 도와주려고 기획한 것”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실제로 정치권의 파장이 적잖다. 뇌물사건 2심 재판과 정치자금 수사가 서울시장 선거운동과 함께 진행되는 만큼 정치적 중립성이 수사의 생명이다. 정치권도 마구잡이식 정치공세는 자제하길 바란다. 정치는 정치이고, 의혹에 대한 수사는 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