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대붕괴 신질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미국 조지 메이슨 대학의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학술 흥행사' 라는 야유섞인 별명이 붙었을만큼 지식인 사회에 끊임없이 논쟁거리를 제공해온 인물이다.

그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은 "역사는 끝났다" 는 도발적 선언이었다.

1992년의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동구 사회권이 몰락한 세계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결합한 체제' 라는 진보의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주장, 학계와 정계의 격론을 촉발했던 것이다.

'역사의 종언' 논쟁은 사실 어휘 자체의 상상력과 파괴력에 힘입은 것이지만, 그 주인공은 이제 스스로 한걸음 물러섰다.

신간 『대붕괴 신질서』(원제 'Great Disruption' )에서 "그러나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에서 역사는 아직도 순환하고 있다" 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책에서도 각종 통계와 생물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인간과 현대사회의 본질 등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논리를 전개, 은근히 지식층의 논쟁을 유도한다.

후쿠야마는 우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이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부터 범죄율의 급증, 가족제도의 몰락, 시민사회의 신뢰도 감소 등 '대붕괴' 를 겪었다고 지적한다.

그가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은 것은 성(性)혁명과 여권운동으로 인한 가족구조의 변화다.

피임약 개발과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는 그 자체는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제도의 붕괴에 일조했으며, 젊은이들의 공격성을 제어해줄 '규범집단 가족' 의 몰락은 범죄의 증가와 사회적 불신풍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올 때도 그랬듯이 정보화사회 이행 과정에서 무너진 사회질서도 결국 재건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 이며 제 아무리 현대적인 기술사회라도 사회규범 없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범죄.이혼 증가율과 불신도(不信度)가 90년대 들어 완화된 사실 등이 그 논거다.

미국에서 2년 전에 선보였던 이 신간 아닌 신간을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일본인 3세인 저자가 대붕괴 현상과 사회문화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것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아시아 회원국인 일본과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국가들이 서구 선진국들과 달리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붕괴' 를 피해간 것은 역설적이지만 아시아적 가치, 특히 여성의 노동참여를 제한해온 정책과 유교적인 가부장주의로 인해 결혼생활이 안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혼자도 지난해만 12만쌍으로 30년 전에 비해 10배가 느는 등 후쿠야마식의 '대붕괴' 를 겪게 될지 모른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 후쿠야마는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변화의 상호작용에 대한 냉철한 분석보다는 가족과 같은 특정가치에 대한 보수주의적 변론에 치우치다보니 대붕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여권신장의 모순적 결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등의 대안은 선뜻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