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언론개혁의 야전교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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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다음과 같은 야전교범(野戰敎範)을 하나 만들려 한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을 가르치는 군대 야전교범이 아니라 언론개혁을 위한 야전교범이다. 평상시라면 기사 스타일북이나 기자 윤리헌장 등을 매만지겠으나 지금은 다르다. 정부나 언론은 아니라고 해도 세상사람들은 모두 "이제 권력과 언론이 한판 세게 붙었다" 고 하지 않는가.

언론개혁이 꼭 이렇게 '이전투구(泥田鬪狗)' 처럼 돼야 하는지 몹시 서글프지만 어쩌랴. 언론사 세무조사가 이미 벌집을 쑤셔 놓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는데. 더구나 이번 일이 언론탄압이라면 더더욱 야전교범이 필수 아닌가. 또 탄압이든 개혁이든 일단 살아 남아야 언론이고 뭐고 있을 것 아닌가.

1.세상 두려운 줄 알라

진정으로 언론개혁을 이루려거든 무릇 세상 모든 것 중에서 '시장' 과 '소송' 이 가장 두려운 줄 알라. 시장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신문이란 상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 와 '신문사란 기업의 퇴출(退出) 여부에 대한 금융의 판단' 앞에 겸허하라는 것이다.

소송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사실이냐 아니냐' 와 '인권을 침해했느냐 아니냐' 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제대로 된 언론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기존 언론을 견제하는 것은 시장과 법(소송)이지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니다. 더더욱 세금 추징이나 무가지 규제가 아니다. 무가지.경품.탈세 때문에 신문시장의 판도가 정해졌다고 하는 것은 독자 두려운 줄 모르고 하는 소리다.

2.교만하지 말라

언론은 권력기관이 아니다. 권력을 견제할 뿐이다. 언론 권력은 쓸 것을 안 쓸 때 흥정으로 주어지고, 정치권력은 안 쓸 것을 쓸 때 강제로 힘을 쓴다. 같이 권력기관인 줄 알고 함께 놀다가 서로 수가 틀어지면 크게 당한다. 권력으로부터, 더 무섭게는 독자들로부터.

3.품위를 잃지 말라

제대로 된 언론은 예컨대 취재원이 잘못 알고 "몽고반점은 중국집" 이라고 했을 때라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실수를 고쳐 주면서 "정말이냐" 고 확인하고 보도한다. 실수와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점잖은 언론이 할 일이 아니다. 다만 몽고반점이 중국집이라고 계속 우기거나 과거에 한 말을 눈 한번 깜짝 안하고 뒤집거나 할 때는 경우가 다르다.

4.뻥 튀기지 말라

언론은 세무조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번에 처음으로 '소비자' 입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버렸다!

이제부터 국세청 세무조사 발표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일단 작게 취급하며 반론을 똑같이 실어주는 것이 올바른 보도태도다.

과거 줄줄이 구속사태를 빚으며 신문에 대서특필됐던 현대상선 세무조사는 대법원에 가서 거의 다 국세청의 패소로 끝났다. 만일 당시에 현대상선이 언론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포르말린이 함유된 번데기 통조림을 식품업자들이 무더기 제조.판매했다" 고 기소한 검찰 발표를 곧이 곧대로 받아 썼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자 무더기 소송에 휘말린 우리 언론들이다. 내가 아파야 남이 아픈 줄 아는 법이다. 이제 국세청.검찰 발표를 곧이곧대로 보도하지 말라. 그랬다간 다 뒤집어쓴다.

5.세상은 복잡하고 관행은 많다

한 줄로 단정지을 수 있는 기사는 사실 없다. 다 뒷얘기와 말못할 사연이 있고 단숨에 뿌리 뽑지 못하는 과거로부터의 관행이 업보(業報)처럼 얽혀 있다. 권력은 지금 '세금은 제대로 내야 한다' 는 견고한 단순논리 뒤편에 꼭꼭 숨어 있다. 무슨 반론을 들이대도 "세금!" 한마디다. 의약분업 때 "국민 건강!" "병원 리베이트!" 했던 것처럼. 언론도 그리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6.건강하라

누구는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했다. 누구는 머리 빌릴 줄을 모른다. 기자는 머리도 건강도 오직 자기 자신이 책임지며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그래도 기자는 할 만한 직업" 이라고 할 날을 맞지 않겠는가.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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