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작은 프랑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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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초구의 프랑스 학교 부근 지역을 작은 프랑스라고 부르게 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프랑스 학교 앞의 보도에 깔려 있는 프랑스 국기의 3색인 백색.청색.적색의 보도블록들이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끈다.

버스 정류장의 팻말과 이정표는 근처 제과점의 제품 이름처럼 프랑스어로 번역돼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상호도 프랑스어로 돼 있으며, 그 중에는 '이다' 라는 상호도 있다. 한국에 잘 알려진 이다 도시의 이름을 따온 것이 분명하다.

또한 오후 4시 종이 울리면 프랑스 학교 앞에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들로 붐비는데, 그 모습은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당히 피상적이다.

그 반면에 어제 고속버스터미널의 센트럴 6극장에서 폐막된 제1회 프랑스 영화제는 한국과 프랑스 두 문화간의 상호교류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과 센트럴 6극장이 주관하고, 여러 탁월한 스폰서의 후원 아래 이뤄진 이번 영화제는 그 규모가 가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프랑스 영화에 항상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주는 부산영화제에 화답할 만한 영화제였다. 한편 부산영화제는 부산에 영화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부여해주고 있다.

이번 프랑스 영화제에 가보지 못했다면 정말 애석한 일이다. 한국 극장의 은막 위에 펼쳐진 10편의 최근 프랑스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가지려면 1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번 영화제의 예기치 못한 즐거움은 영화에 대해 전혀 검열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감독이 기획한 대로 나신.마약.폭력장면이 여과없이 은막 위에 표출됐다. 장 자크 베넥스 감독과 같은 이들은 내한해 작품을 관람했다. 과거에 한국에 왔던 뤽 베송은 영화 상영 도중 그의 작품의 몇 부분에 가위질이 된 것을 보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베송이 감독한 영화 '택시' 에서 한국의 두 택시기사들이 조롱거리로 등장한 것을 보며 사람들은 베송이 그 검열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택시' 란 영화를 보면 나는 항상 많은 한국 친구에게 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관의 어머니와 애인이 바보처럼 웃고 있었는지를 설명해주어야만 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녀들은 대마초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리화나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한국에서는 삭제됐기 때문에 한국관객들은 그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면은 상당히 많다. 심지어 젊은 경관도 어느 순간에서는 대마초를 피운다. 이러한 점은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풍습의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이 영화는 충격을 주거나 검열을 받기보다 찬사를 받았었다.

또 다른 일화는 좀더 오래된 것이다. 당시 나는 한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재능 있고 명성 있는 소설가이자 트럼펫 주자인 보리스 비앙의 노래를 틀고 싶었다. 그의 유일한 음반이 분명 방송국의 서고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방송금지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고, CD의 앞면을 긁어 놓아서 아예 사용이 불가능하게 돼 있었다. 프랑스에도 또한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비앙의 반전가요인 '탈영병' 을 금지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비앙의 이중의 죄악은 그가 공산주의자이면서 또한 평화주의자란 사실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다른 많은 이들도 이와 똑같은 죄목으로 고발됐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으며, 또한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영화 애호가들과 호기심 많은 이들을 위해 영화는 생생하게 그대로 여과되지 않은 채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그것을 택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벌써 오늘 아침 '작은 프랑스' 에는 프랑스인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엄마들은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버렸고, 아빠들은 7월이나 8월 휴가 때 그들과 합류할 것이다. 여름 내내 프랑스 학교의 거리는 텅 빌 것이다. 9월 신학기가 돌아올 때까지 제과점의 바게트 빵도 훨씬 덜 팔리겠지.

브뤼노 카예티 <서울 프랑스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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