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동교동 '씨받이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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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절, 남편은 부인이 '칠거지악(七去之惡)' 에 해당하면 합법적으로 부인을 내쫓을 수 있었다.

시부모에 순종하지 않는 죄(不順父母)와 함께 아이를 못낳는 죄(無子)가 가장 큰 죄였다. 부정(不貞)과 질투, 도벽, 심지어 불치병(惡疾)과 말 많은 것(多言)도 칠거지악에 속했다. 공자의 언행과 문인(門人)과의 논의를 수록한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유래한 악습이다. 남편이 오히려 부인 눈치보기 바쁜 요즘 세태에서 보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하지만 '삼불거(三不去)' 라는 게 있었던 걸 보면 그래도 최소한의 양식은 있었던 모양이다. 여자가 칠거지악의 중죄를 지었더라도 돌아갈 친정이 없거나, 처가 부모가 삼년상 중이거나, 가세를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경우에는 쫓아낼 수 없었다. 이를 어기고 기어코 부인을 쫓아낸 극악무도한 남편에 대해서는 곤장 80대로 다스렸다.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겨난 편법이 씨받이다. 부부가 합의해 부인 대신 자식을 낳아줄 여자를 구해 대를 잇게 하는 방법이다. 씨받이로 들어오는 여자는 대개 천한 신분이거나 가난한 과부였다.

은밀히 씨받이를 골라 길일을 잡은 뒤 씨받이의 생리가 멎고 28~29시간 후 합방을 시켰다. 합방하는 동안 정실부인은 장지문 밖에서 쓰린 가슴을 다독거렸다. 태어난 아이가 젖먹이일 때 정실부인은 씨받이 여인을 돈을 주어 내보냈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소생으로 꾸몄다.

동교동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화갑(韓和甲)민주당 최고위원이 '씨받이론' 을 폈다고 한다(본지 6월 22일자 5면). 씨받이를 맞아들여 옥동자를 낳아 대를 잇게 해줬지만 씨받이에 밀려 안방을 내주고 눈물과 한숨으로 지샌 조선시대의 아이 못낳는 조강지처의 신세가 자신들의 숙명이라고 사람들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아이를 못낳는 정실부인이 아이를 낳은 후처에게 안방을 내준 경우는 있어도 씨받이에게 안방을 빼앗긴 경우는 많지 않다. 강수연에게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 에서도 정실부인은 아이를 얻은 뒤 매정하게 씨받이를 내쫓는다.

옥동자를 낳은 사람이 정실부인이든 씨받이든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다. 그 아이가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대를 잇게 하는 것이 동교동계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아이는 지금 과연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건지.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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