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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한남동 승지원선 이건희-빌 게이츠 만남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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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22면

서울 삼청동 북악터널을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의 베벌리힐스'라 불리는 성북동 부촌이 나타난다. 산수가 수려한 언덕길 양쪽엔 각국 대사관이 띄엄띄엄 터를 잡고 있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장님’들의 빌라가 즐비하다. 성북동은 예로부터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도심에서 가까워 부자들이 선호했다. 인적이 드물고 북적대지 않는 점도 매력적이다. 대기업들의 영빈관이 성북동에 많은 이유다.

국내 대기업의 영빈관

대기업들은 귀빈(VIP) 대접이나 비밀회담 등을 위해 영빈관을 운영하고 있다. 외부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북동 삼청각 뒤편에 위치한 옛 현대그룹 영빈관이 대표적이다. 현대그룹 영빈관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외국 주요 인사와 면담하거나 VIP들을 대접하는 장소로 종종 활용했다. 자신의 생일 때는 영빈관에 사장단을 불러 만찬을 하기도 했다. 2006년엔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와 고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셋째 아들인 정대선씨가 이곳에서 상견례를 해 화제가 됐다. 현대그룹 계열 분리 이후엔 현대중공업에서 관리하고 있다.

포스코와 LG그룹도 한때 성북동에 영빈관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모두 매각한 상태다. 성북동에 ‘영광원’이라는 영빈관을 뒀던 포스코는 2003년 유상부 전 회장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 홍걸씨와 이곳에서 만난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곤혹을 치렀다. 포스코는 2005년 성북동 영빈관을 매각하고 포항과 광양의 영빈관만 운영하고 있다. 포스코 영빈관은 고객에 대한 수준 높은 서비스로 정평이 나 있다. 정준양 회장이 과거 광양제철소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인도에서 VIP들이 방문하기로 하자 정 회장은 이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서울에 있는 인도음식점에 영광원 직원들을 보내 인도음식 요리법을 배워 오도록 주문한 일이 있다.

옛 LG 연곡원은 드라마 단골 촬영지
LG그룹이 성북동에 갖고 있던 영빈관은 ‘연곡원’이었다.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이 살았던 저택을 개조해 VIP들을 대접하거나 비즈니스 회의 장소로 사용했다. 연곡(蓮谷)은 구인회 회장의 아호인 연암(蓮庵)의 연(蓮)과 동생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아호인 춘곡(春谷)의 곡(谷)에서 따온 말이다. 연곡원은 2007년 LG그룹이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비업무용 부동산들을 일괄 매각할 때 함께 정리됐다. 국내의 한 건설사에 팔린 연곡원은 최근 TV 드라마 제작사들의 촬영지로 많이 이용된다. 넓은 정원을 낀 전통 양옥 형태로 전형적인 재벌가 저택의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종영된 KBS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에선 극중 병원장의 집으로 등장했다.

삼성그룹의 영빈관은 ‘승지원’이다. 성북동 외에 강북 최고 부촌으로 꼽히는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의 거처였던 승지원은 1987년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으며 새롭게 태어났다. 전통 한옥인 본관은 이 회장의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양옥으로 지어진 부속 건물엔 상주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한옥 건물은 궁궐 건축의 국내 최고 전문가인 신응수 대목장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그는 지난해 12월 숭례문 복원 도편수(총지휘자)로 선정된 전통건축 분야 최고의 장인이다.

승지원에선 전경련 회장단 모임 등 공식 모임이 가끔씩 열리기 때문에 국내 대기업 영빈관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 경영 복귀를 선언한 이건희 회장은 이곳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보며 삼성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열기도 한다. ‘창조경영’이라는 화두도 승지원에서 열린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처음 나왔다.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등 글로벌 CEO들과의 만남도 승지원에서 이뤄졌다.

SK그룹은 따로 영빈관을 두고 있지 않지만 외빈 등 VIP 만찬 자리가 필요할 때는 워커힐 호텔 내 별채인 '애스톤하우스'를 임대한다. 2008년 11월엔 최태원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 회의와 만찬을 애스톤하우스에서 주재했다. 430평 규모의 단독빌라인 애스톤하우스는 침실·응접실·서재·회의실·드레스룸 등을 갖추고 있다. 1층은 연회공간, 2층은 침실과 응접실, 지하엔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주방시설이 마련돼 있다. 일반인들이 이용하려면 하룻밤 숙박비만 1500만원으로 국내 호텔 객실 중 가장 비싸다.

애스톤하우스는 워커힐호텔이 88년 4월 총공사비 50억원을 들여 완성한 VIP맨션을 2000년에 개조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VIP맨션이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이 추진했던 남북정상회담을 대비해 세워졌다는 점이다. 당시 정부 측 관계자는 '김일성 주석을 포함해 북측 고위 인사들이 서울에서 묵을 장소로 만들어졌다'며 “회담이 무산되면서 자연스럽게 SK의 영빈관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심은하·김희선 결혼 장소로 유명
외부와 차단된 애스톤하우스는 최근 들어 연예인들의 결혼식 장소로 더 유명하다. 탤런트 심은하·김희선이 결혼식을 올렸다. 크리스찬 디올 같은 명품브랜드의 패션쇼 장소로도 각광 받고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최근엔 애스톤하우스보다 서울 서린동 SK 본사 꼭대기에 있는 SK클럽을 더 자주 활용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남산 힐튼호텔의 23층 펜트하우스를 ‘영빈관’으로 애용했다. 평소엔 호텔 영업장과는 아예 분리해 운영돼 왔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과 철통 보안으로 비밀스러운 회담도 곧잘 열렸다. 92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한 경제 고위급 회담 때 만찬이 진행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북한에서 방문한 경제사절단을 위해 23층 연회장 바닥 전체를 다다미로 깔아 온돌처럼 보이도록 세심한 정성을 들였다. 당시 회담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일부 북측 인사는 이탈리아 명품인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왔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며 "펜트하우스 시설과 만찬에서 제공한 음식에 상당히 흡족해서 돌아갔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의 펜트하우스는 최근 힐튼호텔을 인수한 씨디엘호텔코리아의 소송을 통해 다시 화제가 됐다. 대우개발은 99년 외환위기 여파로 호텔을 팔면서, 김 전 회장이 연간 임대료 12만원에 25년 동안 펜트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는 장기 임대 계약을 체결했었다. 씨디엘코리아는 김 전 회장을 상대로 영업에 방해가 된다며 방을 비워 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김 전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오너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대기업 영빈관들은 최근 들어 효율적이면서 개방적으로 바뀌는 추세다. 현대ㆍ기아차그룹은 외국인 손님과 임직원 숙소로 쓰고 있는 경기도 화성의 '롤링 힐스'를 특1급 호텔로 리모델링해 올 상반기 중 개관할 예정이다. 약 100억원을 투입해 객실 수를 줄이는 대신 공원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늘려 일반 투숙객도 받을 계획이다. 롤링 힐스는 현대차 소유지만 정식 호텔로 바뀐 후엔 실질적인 운영을 계열사인 해비치리조트가 맡아 고객 서비스에도 더욱 신경을 쓴다는 계획이다.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사업 비중이 늘면서 해외 바이어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영빈관을 세우는 사례도 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울산 본사에 전통 한옥으로 영빈관을 짓고 있다. 5개 동 123평 규모의 한옥 영빈관은 지난해 말 본 건물 공사를 마치고 현재 인테리어와 조경작업이 한창이다. 회사 측은 본사를 방문하는 선주(船主) 등 해외 귀빈들이 이곳에서 한국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삼성의 승지원을 세운 신응수 대목장이 이번에도 건축을 맡았다. 두산중공업은 2007년 창원공장 내에 최고급 호텔 수준의 '게스트하우스'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총 80개의 객실을 갖춘 이곳은 지난해만 2500명 이상의 VIP가 다녀갔다. 두산그룹의 신동규 상무는 "해외 바이어를 위한 숙박과 접대 기능에 초점을 맞춘 곳"이라며 "최고급 시설과 음식으로 해외 바이어들의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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