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기숙사에서 일하는 선배에게서 들은 얘기다. 기숙사에 방이 비어서 대기자인 한 학생에게 연락을 했다. 아무리 해도 연결되지 않기에 보호자에게 전화를 했단다. 그 아버지는 지방 도시의 의사였다. 그를 통해 학생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아이가 지금 몹시 바쁘니 내가 올라가 수속을 하겠다”고 하더란다. 학생이 직접 해야 한다고 했더니 통사정하는 말. “학원에 다녀야 하고, 방해할 수 없으니 제발 내가 하게 해 달라.” 그 선배는 “자녀가 스펙을 쌓는 동안 의사인 아버지는 기꺼이 생업을 덮고 달려올 기세더라”고 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와서 꽂힌 건 ‘그놈의 스펙’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아이들은 스펙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고등학생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대학생들은 취업을 하려고 인증시험에 봉사활동에 사회경험까지 끝도 없는 스펙 쌓기에 나선다.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신나게 하는 일이라면야 더 말할 것 없이 좋은 일이다. 한데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는 그게 아니다. 아이 스펙 쌓기에 부모들이 신발끈 질끈 동여매고 나선다. 유능한 엄마들은 각종 인증시험 날짜부터 그 시험이 어떨 때 유리한지까지 빼곡히 꿰고 있고, 스펙을 높여준다는 학원 설명회에도 쫓아다니며 스스로 ‘정보의 원천’이 된다.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면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는 항간의 우스갯소리도 있다. 3대 스펙이 맞아떨어져야 대학에 간다고? 물론 과장됐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일찍이 ‘네 인생은 너의 것’을 선언하고 쿨한 부모를 자처하곤 있지만 세상이 이러니 뒷골이 당긴다. ‘세상의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화초가 아니라 잡초여야 한다’고 세뇌하는 것도, 실은 자기도 살기 바빠 허덕이는 부모의 ‘저질 스펙’을 위장하려는 거라는 걸 아이가 눈치챘을까봐 걱정스럽다. 스펙 좋은 부모가 함께 뛰는 세상에 홀로 뛰어야 하는 아이가 딱하기도 하다. ‘대학 가고 취업하는 데도 부모 스펙 빵빵해야 유리한 더~러운 세상….’ 부질없이 세상에 화풀이해도, 스펙 허접스러운 부모는 마음만 고단하다.
양선희 위크앤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