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답방에 매달리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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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평양 정상회담으로 극적 성과를 거둔 남북관계는 그후 1년이 지나도록 - 역시 현실에 편입되지 못하고 - 드라마 상태로 남아 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석달만에 나온 미국의 한반도 정책 검토결과는 부시 대통령의 취임 전후 천명된 것과 사실상 다르지 않고 대화를 재개한다는 것으로만 고무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애타게 기다린다고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 이 실현될지 의문스럽다.

*** 조급해 말라는 북의 신호

金대통령은 5월 24일 외신기자 모임을 빌려 '남북 정상회담 1주년을 계기로 金위원장이 서울 방문에 대한 스케줄을 밝혀줄 것' 을 요구했다.

그후 열흘 만에 나온 북한의 반응은 그들 상선의 남한 영해 및 북방한계선(NLL)침범이었다. 남북관계를 협상의 궤도 위에서 진지하게 풀어갈 의도가 없다는 증거로 충분하다. 사실은 서울 답방에 조급해하지 말라는 북한의 신호로 받아들였어야 했다.

정전체제를 노골적으로 도발해놓고 서울 방문을 실행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서울 답방 약속은 반드시 이행돼야 한다" 고 다시 말했다. 외교에서는 일이 잘 될 가능성이 없을 때 왕왕 공개적으로 나간다.

답방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까닭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심상찮은 미.북관계의 향방이다. 미국은 김.부시 정상회담 때도 답방에 대한 '희망' 을 표시했고 이번에도 파월 국무장관을 통해 그렇게 했다.

언뜻 답방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외교적 겉치레와 실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희망과는 별개로 부시 대통령은 이번에 대북정책 검토결과를 공개(公開)함으로써 미.북 '협상' 의 여지를 사실상 좁혀 놓았다.

미사일 개발에 대한 억제 검증과 재래식 무력위험 감축을 포함한 세개의 의제를 명시한 것이라든지, 포괄주의로 '토의' (discussions)를 진행시키겠다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나아가 북한이 긍정적으로 응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북한 주민을 도와주고 제재를 완화하며 기타 정치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은 고압적으로 시혜를 비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으로선 여간한 도전이 아니다.

답방을 어렵게 하는 다른 이유는 답방의 효과에 대한 북한의 소극적 판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은 물론 답방의 대가다. 金대통령의 평양 방문 대가로 받아낸 것은 바로 金위원장의 노출이었다. 외부세계에 대한 그의 노출 자체로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서울 방문 드라마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노출의 결정적 효과는 처음 보여줄 때이고 드라마가 잦아지면 흥행 효과가 감퇴하게 마련이다.

특히 남한의 정치.경제 정세는 더 '퍼주는' 식으로 드라마의 비싼 관람권을 사줄 수 없게 돼 있다. 또한 국외연출 드라마가 무대 밖으로 이탈할 수 있는 사고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큰집에 나들 듯이 하는 중국 방문도 비밀리에 하는 판에 실속 없는 서울 방문을 위해 과연 발가벗을 것인지 간단하지 않다.

더군다나 답방이 곧 개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전기가 돼 개방되면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나 지금의 북한이 소멸 직전의 소련과 다르지 않다는 소리는 답방을 꺾는데 유력한 구실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 조용한 통일외교를 펴야

답방 여건이 좋아져 나중에 성사되더라도 그것이 평양 정상회담의 속편이 돼선 안된다. 남북 간의 정치드라마는 7.4공동성명 이래 해볼 만큼 했다.

'만나기 위한 만남' 은 더 필요 없다. 퍼줄 만큼 퍼주었다. 퍼주고 할바에야 누구라도 할 수 있다. '金위원장은 서울에 와서 주고 얻어갈 것이 없는 상황' 이라는 일부 집권세력의 인식은 처량할 정도의 진실이다. 자주통일을 떠들어대면 진짜통일에 실기할 수 있다.

'연합/연방' 이니 '평화선언/협정' 이니 하는 허튼소리를 내면 이로울 게 없다. 서독은 통일방안 없이 통일을 이뤄냈다. 믿을 만한 상대라고 동맹국이 인정할 만큼의 알찬 그 외교가 크게 한몫 했다.

미국과의 인연을 숙명적 요행으로 알아야 할 한국외교가 분단의 현실과 지정학적 제약을 깜박하고 과욕을 부린 불찰이 없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특히 북방에의 부질없는 충동과 권력욕 때문에 분별 있는 통일외교를 조용히 펴지 못한 것을 말이다.

이장춘 전 외무부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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