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파노라마] 궁궐 지킴이 박상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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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궁궐에 왜 개암나무가 많은지 알아요?"

9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 홍화문 앞. 고등학생 10여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모르겠어요. 알려주세요" 를 외쳤다.

학생들의 재촉에 '궁궐 지킴이' 의 설명이 이어졌다.

"귀신을 쫓기 위해서죠. 개암나무와 귀룽나무는 귀신이 가까이하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그럼 앵두나무가 유독 많은 이유는?"

"이번에도 귀신인가요?" 하고 학생들이 되묻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세종대왕이 앵두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 치아가 나빴던 부왕(父王)이 씹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앵두를 좋아하자 아들 문종이 궁궐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창경궁을 찾은 천유철(16.경기도 고양시 무원고 1년)군은 "궁궐 곳곳에 서려있는 사연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 며 "궁궐 지킴이의 설명이 없었다면 뛰어놀 수 있는 소풍 장소로만 생각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서울 시내 궁궐이나 나무에 대해서 훤하게 꿰고 있는 주인공은 박상인(60.서울 서초구 반포3동)씨. 1999년 영등포 장훈고등학교에서 31년간의 교직생활을 접은 전직 교감 선생님이다.

朴씨는 "교실을 학교에서 사회로 옮겼을 뿐" 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퇴직 후의 상실감은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넘게 시간밥을 먹어서 그런지 집에 앉아 있으면 지금쯤 몇 교시가 끝났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 어느 날은 동네 초등학교 운동회의 호루라기 소리에 이끌려 몇 시간 동안 학교 담장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궁궐 지킴이에 대해 알게 됐다. 겨레문화답사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화강좌 공고를 보고 "그래! 이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3개월 동안 옛날 건축과 궁중사.풍수학과 문화재보호법 등에 대해 전문교육을 받고 99년 9월 궁궐 지킴이 1기생이 됐다.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안내를 해주겠다고 해도 돈을 받는 줄 알고 사람들이 도망가더라고요. "

"TV에서 사극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맞고 있잖아요.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곳이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장소, 드라마의 무대 등을 설명하면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요. "

그는 창경궁에 있는 1백여종의 나무에는 옛 왕조시대의 역사와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귀띔한다.

3년째 매주 토요일마다 궁궐 지킴이를 하다 보니 이제 궁궐이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온다는 그는 "반평생 교사로 살면서 저 역시 고궁을 데이트 장소로만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지금은 창경궁에 올 때마다 참회하는 마음이 듭니다" 라고 말했다.

朴씨는 나무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생물 과목을 가르친 인연으로 학교 화단은 제 책임이었죠. 정서가 메마른 학생들에게 꽃과 나무에 얽힌 사연이나 전설을 들려주다 보니 어느새 '박사' 가 되더라고요. "

이런 지식을 활용해 매주 일요일 경기도 양평의 중미산 휴양림에서 '숲 해설가' 로도 활동하고 있다.

초여름, 웨딩드레스를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커플들에 대해서 한마디. "글쎄요. 궁궐은 수많은 여인들이 임금만 바라보며 한 평생을 보냈던 곳, 슬픈 장소죠. 이곳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죠. "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가. 색다른 풀이가 흥미롭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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