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의 지상기우제] 하루빨리 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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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늘을 우러러 우리 모두 비가 오시길 간구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예부터 비 오거나 볕 나거나 덥거나 추운 것, 그리고 삼라만상이 살찌고 여위는 것은 대체로 하늘보다 사람의 몽매함으로 비롯된다 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늘의 보우(保佑)를 형용(形容)의 절묘함과 수사의 치레로 기구해 왔으나, 정작 우리들의 허물과 탓을 되돌아보는 것에 소홀하였습니다.

헐뜯고 모함하고 거짓말하는 일에는 몰두하였으나 먹고 마시는 것의 마땅함을 가리지 않았고, 쓰는 것과 버리는 것을 침착하게 가리지 못했던 아둔함을 되돌아보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간사하고 아첨하고 제 몫을 챙기는 일에 자제력을 잃었던 경박함과 방자함에 대한 자기견책도 게을리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 변계량(卞季良)의 말처럼, 하늘이 바로 만물의 아버지인 것을 잊어버린 반편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비와 이슬이 내리면, 만물이 소생하고 번영한다는 간단한 이치를 저버린 과문(寡聞)과 몽매가 우리들한테 있습니다. 한낱 벌레가 죽게되어도 덩달아 인걸도 간데 없어진다는 생태의 순리와 이치를 깨닫는 일에 미흡하고 게을렀습니다.

젖은 흙에 씨앗을 박아야, 비로소 껍질을 박차고 나와 움터서 한량없는 푸름과 결실로 찌든 삶을 비옥하게 가꿔 준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개여울이나 봇도랑에서 헤엄치는 피라미와 붕어가 우리들의 상상력과 꿈과 감성을 키워주고 유지해주는 유일한 보배였던 것을 대수롭잖게 알았습니다.

배척과 조급함, 증오와 은폐가 난무해 인간이 일찍부터 소망해온 고상한 용모가 훼손돼 버린 것도 모두 하늘의 권고(眷顧)를 한낱 초개처럼 여긴 우리들의 오만과 편견 탓입니다.

물을 물쓰듯 하면서도 한재가 닥쳤던 지난 날을 기억하지 않았고, 태어날 때부터 섭생에 익숙하게 길들여졌으면서도 정작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사람의 뼈 속 깊이 스며든 고통과 좌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늘의 너그러움이 어찌 우리들의 척박한 삶을 끝내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물은 우리들 열등한 육체에 유장한 순환의 힘과 열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었고, 각성과 기특함을 부여했습니다.

더위에 지쳐 기갈든 길손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사발을 건넸던 것은 우물가에서 생겨난 아녀자들의 지혜였고, 달이 뜨는 밤이면 마을의 원로들이 오순도순 논두렁에 모여 앉아 담뱃불을 나누고 세상물정을 얘기하며 먼 곳으로 길 떠난 이웃의 논밭에 먼저 물을 대주곤 했던 것은 나눔과 베푸는 것의 은혜를 터득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들을 꾸짖고 책망하되 삼라만상이 모두 제각기 온전한 모습으로 눈을 뜨고 활개를 뻗어 기백을 되찾게 마련하시고, 우리의 아이들이 맑은 냇물에서 자맥질하고 반두질하고 명멸하는 반딧불이와 놀아서 어린 날의 꿈을 키우며 자라나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상극이어서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다시 화해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때 우리는 물꼬를 트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거북등처럼 갈라진 사래 긴 논밭에 꿀과 같은 물이 스며들어 넘치게 물꼬를 터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들 삶의 무게중심이 호들갑스럽게 이동해 단절과 혼돈을 겪어야 한다는 치명적인 두려움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우리들의 삶이 모두 하늘의 은혜와 배려로 비롯되고 있음을 오늘에야 뼈아프도록 깨닫는 미욱함을 보살펴 주소서.

검약함을 모르고 오만과 허세에 마비되고 함몰해 나날이 매몰차고 각박해지는 인심을 오직 남의 탓으로만 돌린 죄과가 없지 않습니다.

물이 바로 꿀이라는 것을 몰랐던 숙맥이었습니다. 맑은 하늘이 그토록 맑고 빛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비를 내리게 하는 구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은혜가 이토록 간절한 것도 절도와 통찰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부박한 삶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를 끝끝내 외면하시면 우리들의 생명은 가까스로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희망은 아득합니다.

하늘이시여, 이제 무릎 꿇고 순천(順天)하겠사오니 비를 내리소서.

김주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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