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희의 노래누리] 'H.O.T'는 가상인격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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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지혜양에게.

님이 제게 e-메일을 보낸 지도 벌써 한달이 다 돼가는군요. 그날, 그룹 H.O.T.가 해체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한달 전 일요일 밤, 님을 비롯한 수많은 팬들이 제게 e-메일을 보냈습니다. 인터넷 기자포럼(http://club.joins.com/club/jforum_cjh)에는 1천4백편이 넘는 글이 올랐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장인 셈입니다.

님들이 글을 통해 보여준 마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묘한 변화를 보였습니다.

처음엔 '작문 아니냐' 며 믿지 않으려 하더군요. 이어 언론과 H.O.T. 소속사를 비난하며 화를 냈습니다. 다음엔 '다시 뭉칠 것' 이라며 희망을 찾으려 했고, 그리곤 '이제 어떡해요' 라며 몹시 슬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해체 사실을 받아들이며, 격앙됐던 상태에서 보낸 e-메일이나 쓴 글에 대해 사과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혜양. 이런 반응은 어쩌면 불치병으로 죽음을 맞는 이들 혹은 그 가족이 겪는 '부정-분노-기원-우울-수용' 의 다섯 단계 심리적 반응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님들에게 그 그룹의 해체는 님들이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가상 인격체의 사망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맞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자연인의 죽음과 달리, 님들이 애도하는 그 인격체의 종언은 주변의 동정이나 슬픔을 받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조롱하고 박수를 치는 이도 있었고, 눈물 흘리는 님들을 이상하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슬픔은 더 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중문화 스타들이 본격 떠오르기 시작한 20세기 이후 사실 어떤 젊은 세대가 그들의 우상에 환호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때마다 기성세대들은 '말세' 운운하며 못마땅해 했던 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지혜양. 며칠 전엔 H.O.T.를 탈퇴한 한 멤버의 생일잔치가 있었지요. 수천명이 모인 그 장면에 많은 이들이 또 의아해했습니다. 저는 그날 행사를 H.O.T.에 대한 일종의 추념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혜양. 죽음의 그 순간, 떠나는 이와 남는 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원한.미움 등 묵은 감정을 털어버릴 때, 가고 남는 이들 모두 편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피가 도는 사람과의 이별도 그럴진대, 가상의 인격체 하나 편하게 못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의 슬픔을 성숙하게 넘어설 때, 님의 정서와 인격은 한층 성장하고, 스타에 대한 님들의 사랑 역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을 것으로 믿습니다.

최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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