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천상병 '비·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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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 비는 무적함대.

나는 그 사령관인 양 바다를 호령하여,

승리를 위하여 만전을 다한다.

실지로는 우산을 받치고 길을 가지마는,

옆가의 건물들이 군함으로 보이고,

제독은 외로이 세상을 감시한다.

가로수들이 마스트로 보이고,

그 잎잎들이 신호기이니,

천하만사가 하느님 섭리대로 나부낀다.

천상병(千祥炳.1930~93)의 '비.10'

극심한 봄가뭄에 타는 마음들이 하늘에 비를 빌고 있다. 순진무구한 시인의 상징인 천상병 시인이 빗속에 빠진 도심을 마치 함대인 양, 자신은 함대의 제독인 양 의기양양하게 걷고 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나 보다. 천하만사가 하느님의 섭리대로라며 흡족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렵지 않은 비유로 비오는 날 우주의 섭리로 단박에 들어가는 그 천진스런 시적 기법이 부럽다.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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