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들의 상큼한 후식 '점심산책'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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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서울역 앞 D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 세명은 오늘 색다른 점심을 기획했다. 회사 부근 식당에서 간단하게 밥먹고 함께 남산을 걷는 것. 준비물은 없다. 양복 웃옷도 회사에 걸어놓고, 맨손 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초여름의 햇살과 신록, 바람은 값으로 매기기 어렵다. 남산에서 만난 세 사람은 "점심시간에 종종 이렇게 걷는다" 며 사진기자가 들이댄 카메라에도 자연스럽게 응했다.

요즘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들이 부쩍 늘었다. 사무실이 밀집한 도심의 공원들은 직장인들의 쉼터 노릇을 톡톡히 한다. 서울역.장충동 부근 직장인 중엔 장충동~서울타워, 남산도서관~장충동 등 다양한 코스를 고루 즐기는 '남산 매니어' 도 있다.

사무실이 시청 근처인 김원교(42)씨는 1년째 일주일에 세번은 남산을 찾는 열성파. 회사에서부터 잰 걸음으로 출발해 남산을 다녀오는 그는 "부족한 운동도 하고 머리도 식히는데 산책이 그만" 이라며 "벚꽃이 필 무렵부터 남산을 찾는 직장인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고 말했다.

역시 좋은 햇살과 선들한 바람까지 갖춘 요즘 날씨가 사람들을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여의도 공원도 점심시간이면 바람쐬러 나온 직장인들로 붐비는 곳. 김밥.샌드위치 등을 싸들고 나오는 직장인들도 적잖다.

회사원 안수정(32)씨는 틈만 나면 도산공원과 학동공원 등을 즐겨 찾는 또다른 산책파. 획일적이고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는 그는 사람들과의 약속장소로도 공원을 애용한다. "요즘 날씨에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면 대화의 분위기는 물론 내용까지 신선해진다" 는 그는 "많은 사람이 커피숍이 아니라 공원을 찾을 수 있게 도심에 녹지 공간이 더 늘어나야 한다" 고 말했다.

이밖에 덕수궁.경복궁을 비롯해 남대문.인사동.정동길 등도 근처 직장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산책코스. 그러나 이 발길이 인사동.사간동의 미술관 찾기 등 문화산책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 신정아씨는 "점심시간에 오는 직장인 관람객은 열명 이내" 라며 "짬을 내 미술과 가까워지는 것(관람료 보통 2천원)도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 이라고 했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요즘 직장인들은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자기 일과 조직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다" 면서 "산책은 걷기 운동도 되고 사색 시간을 갖게하므로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

산책은 물질적 풍요 못잖게 일상이 주는 소박한 즐거움과 여유를 돌아보게 된 요즘 사람들의 가치 변화와도 맞물려 있는 듯 하다.

이런 면에서 40대를 넘어선 중년들에게 산책은 좀더 절실해진다. '흔들리는 중년 두렵지 않다' 를 쓴 서울대 이미나 교수(사회교육학)는 "현대인들은 방향도, 이유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가다가 강물로 돌진하는 쥐와 같은 모양이 될 수 있다" 며 "특히 성취지향적이고, 서두르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타입의 사람일수록 점심시간에는 책상 위의 일거리를 치우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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