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정호승(1950~ )의 '밥그릇'
어찌 밥그릇의 밑바닥뿐이랴. 쌀통의 밑바닥, 술잔의 밑바닥, 은행 통장의 밑바닥, 인생의 밑바닥, 사랑의 밑바닥, 죽음의 밑바닥, 존재의 밑바닥…. 무엇이든 그 밑바닥에 닿아보지 않고는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시의 화자가 그릇의 밑바닥을 핥는 개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면서 시에 긴장이 더해진다. 개보다 못한 사람은 이럴 때 가슴이 뜨끔해지며 꼬리를 뒤로 슬슬 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기꺼이 개밥그릇을 핥는다.
안도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