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정호승 '밥그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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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정호승(1950~ )의 '밥그릇'

어찌 밥그릇의 밑바닥뿐이랴. 쌀통의 밑바닥, 술잔의 밑바닥, 은행 통장의 밑바닥, 인생의 밑바닥, 사랑의 밑바닥, 죽음의 밑바닥, 존재의 밑바닥…. 무엇이든 그 밑바닥에 닿아보지 않고는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시의 화자가 그릇의 밑바닥을 핥는 개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면서 시에 긴장이 더해진다. 개보다 못한 사람은 이럴 때 가슴이 뜨끔해지며 꼬리를 뒤로 슬슬 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기꺼이 개밥그릇을 핥는다.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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