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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 '세상의 근원' 外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서양미술사는 '허구에 드리워진 지적(知的)인 베일' 이라 할 만하다. 결국은 제도권 미술교육의 그림자이겠지만, 일년 내내 미술 전시회 한번 안 가던 사람도 고흐니 미켈란젤로니 하는 이름을 들으면 일단 귀가 솔깃해진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에 얽힌 아우라는 독자들을 비밀의 화원으로 이끄는 열쇠다. 『세상의 근원』과 『미켈란젤로의 딸』도 이러한 비밀스런 열쇠를 선물하는 책들이다.

외설에 가까운 여성 성기 묘사로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기념 사진 촬영 1순위로 꼽히는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유화 '세상의 근원' . 평생을 독신으로 고독하게 산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와 그의 여인들. 서양미술사에서 채취한 모티브와 한웅큼 고여있는 상상력의 우물에서 길어온 분방한 서술이 모처럼 소설 읽는 재미를 던져준다.

"아래 위가 뭉텅 잘린 그 육체, 눈부신 햇빛을 받아 농익을 대로 익어 터져버린 멜론처럼 갈라진 치골을 덮은 털 위로 벌린 그 두 다리, 그것은 바로 나, 조안나 히퍼넌이다. " 『세상의 근원』은 쿠르베의 연인이자 논란이 됐던 작품의 모델인 조안나 히퍼넌의 수기 형식을 취한다.

히퍼넌은 실존 인물이지만 책의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가 재구성한 것이다. 이 그림은 1백30년 동안 작가가 그렸다는 사실만 남은 채 그림의 행방과 제목이 비밀에 붙여졌었다.

게다가 최종 소장자가 철학자 자크 라캉이었다는 점, 그가 1백50만프랑이라는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는 점 등이 훗날 알려지면서 신비감을 가중시켰다.

히퍼넌의 기술은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여자를 그리는" 탐욕적이고 탐미적인 '남성 쿠르베' 와의 연애담이다. 동시에 "나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이 그림을 그린다" 고 선언한 '화가 쿠르베' 가 문제작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추적한 기록이기도 하다. 여성의 질을 만물이 탄생하는 '세상의 근원' 으로 파악한 쿠르베의 시각은 비록 히퍼넌에게 난처하고 굴욕적인 자세를 요구했지만 깊이가 있다.

옮긴 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여자가 자신의 온 몸으로, 현재와 과거를 몽땅, 느낌과 기억을 담고 있는 자신을 던져서 감싸안는" , 좀더 성숙하고 심오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딸』은 좀더 '소설적' 이다. 등장인물도 모두 가공이다. 한국어 제목을 풀이하자면 '미켈란젤로가 낳은 딸' 이라기 보다 '미켈란젤로라는 끈으로 이어진 여인들' 에 가깝다.

15세기 피렌체에서는 위대한 예술가를 홀로 사모하는 소녀 줄리에타가 그의 다비드상 작업 광경을 훔쳐본다. 20세기 LA에서는 줄리에타의 후손 로미가 줄리에타에게서 물려 받은 다비드상의 조각을 아끼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주위의 화가들에게서 고립돼 '사형집행인처럼 고독한 존재' 였던 미켈란젤로가 한 소녀의 흠모의 대상이었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여성이 시대적 편견을 이겨내고 예술가의 열정을 불태운다는 메시지가 시.공을 초월해 이어지는 구성도 괜찮다. 허나 미켈란젤로가 없었다면 그냥 평이한 이야기일 뻔했다.

기선민 기자

NOTE:국내 소설 중에서도 서양미술사를 이야기를 풀어가는 흥미로운 열쇠 또는 의미있는 상징으로 사용한 수작들이 있다.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 등장하는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성모’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 『헤르메스의 기둥』(송대방)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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