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 LG배서 대역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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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바둑계의 세계 최강자 이창호(26.사진)9단이 '섬소년' 이세돌(18)3단에게 대 역전승을 거두며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李9단이 처음 내리 2연패할 때는 승부가 끝난 듯 보였다. 조남철9단-김인9단-조훈현9단-이창호9단으로 이어진 한국바둑 1인자의 계보에 이세돌의 이름이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방심이 승부의 흐름을 바꿔놓았고 李9단은 벼랑 끝에서 그걸 움켜잡았다. 2연패 후 3연승이란 역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LG배 세계기왕전(우승상금 2억5천만원)에서 2000년 MVP이자 '신예최강' 인 이세돌과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 이창호가 바둑계의 판도를 좌우하는 한판 승부를 시작한 것은 지난 2월이다.

이 두 사람의 기풍은 완전히 창과 방패였다. 李9단이 부동심(不動心)을 바탕으로 기다림과 수비, 인내와 계산의 바둑을 추구한다면 이세돌은 격정적이고 공격적이며 고양이 발톱처럼 날카로운 승부호흡을 지닌 전투형 기사였다.

결승 첫판에서 李3단의 강력한 공격에 휘말려 李9단의 대마가 죽어버렸다. 2국에서도 李3단은 중반 역습을 성공시켜 압승했다. 이 예상을 뒤엎는 진행에 바둑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바둑을 급전으로 이끄는 이세돌의 전략이 적중했다지만 거기에 정신력이 탁월한 이창호가 말려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후 3개월 동안 이창호는 다른 세계대회 등 중요 대국에서도 연전연패했다. 지난 10년간 신화적인 존재였던 이창호는 깊은 타격을 입은 듯 무기력했고 이세돌의 정상 정복은 임박한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 15일 속개된 제3국에서 李3단은 결정적으로 우세한 국면을 만들어놓고도 연속 실수를 범해 역전패했다. 모든 흐름이 이 순간 뒤바뀌고 말았다. 기적처럼 페이스를 회복한 李9단은 4국을 가볍게 이겨 2대2를 만들더니 21일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5국에서도 백으로 불계승해 대 역전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세계 최강자의 저력이었다.

정상을 다투는 두 사람의 혈전은 앞으로도 길게 이어지겠지만 李3단으로서는 작은 방심으로 댐을 무너뜨리고 만 이번의 패배를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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