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내한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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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발레작품에 장대한 사상이나 철학을 담아낼 수 있다고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21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54)은 '생각하는 발레' 를 만든다. 현대무용의 표현력에 고전발레의 테크닉을 접목시켜 철학적인 주제를 구현하는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졸라와 같은 대문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재주를 지녔다.

오늘날 전세계 무용계는 클래식발레의 울타리 안에서 끝없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에이프만을 주목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고 내한한다. 27일~6월 2일 LG아트센터. 레퍼토리 역시 그의 독창성을 대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전설적인 러시아 발레리나 올가 스페시브체바의 비운의 삶을 그린 '붉은 지젤' , 그리고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천재 예술가의 고뇌를 그린 '차이코프스키-미스터리한 삶과 죽음' 이다.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이 내한하기는 이번이 세번째이지만 발레단을 대표하는 3대 작품을 모두 공연하기는 처음이다. '차이코프스키-미스터리한 삶과 죽음' 은 1994년 내한공연 때 선보인 '차이코프스키' 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10대 때부터 안무를 시작한 에이프만은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 안무가를 거쳐, 키로프 발레학교와 말리 오페라 발레극장의 안무가로 활동했다. 75년 키로프 발레단이 공연한 '불새' 는 그의 이름을 세계 무용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에이프만은 전통적인 안무가로서가 아니라, 거침없는 도전정신으로 세계 무용계에 더욱 뚜렷이 각인됐다. 만드는 작품마다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했던 77년 '노뷔 발레'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전신)를 설립한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로큰롤을 사용한 파격적인 드라마와 코미디, 그리고 인간심리를 깊이 파헤치는 작품들을 잇따라 만들어냈다.

체제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노력은 구 소련 붕괴 이후 더욱 값진 자산이 됐다. 구 소련시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운영됐던 볼쇼이를 비롯한 많은 예술단체들이 오늘날 사실상 창작을 포기한 채 '백조의 호수' 등 고전 레퍼토리로 연명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에이프만의 공격적인 창작활동은 더욱 빛난다.

"발레는 나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동시에 사고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나는 발레를 통해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라는 고백에서 그의 치열한 예술혼을 발견할 수 있다. 공연개막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3시30분.7시30분, 일 오후 6시. 02-2005-0114.

박소영 기자

▶차이코프스키-미스터리한 삶과 죽음(27~28일)=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고뇌에 찬 창작과정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 말년의 차이코프스키가 환각에 빠진듯 자신의 과거의 흔적들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다. 동성애자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차이코프스키 내면의 갈등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94년작.

▶붉은 지젤(29~31일)=에이프만이 20세기 초반 활동했던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올가 스페시브체바(1895~1991)의 비운의 삶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 러시아와 유럽의 최고 무용수로 군림한 그의 불우한 유년시절, 혁명과 전쟁, 연인과의 불화, 외로운 말년 등을 격정적으로 표현했다. 97년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6월1~2일)=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소설을 2시간으로 압축해냈다. 사회주의 붕괴후 혼란 속에 빠진 러시아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발레예술과 철학을 융합시킨 에이프만의 작품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9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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