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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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63. 한 ·미 쇠고기 마찰 조율

"정인용(鄭寅用) 부총리가 정초에 워싱턴을 급거 방문, 미국측 대표들과 연쇄회담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빈 손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정부총리가 귀국하면서 휴대한 것은 조만간 한국이 미국의 관심분야인 쇠고기 시장 개방, 양담배 시판가격 인하, 보험시장 개방 등에 대해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미국은 미 통상법 3백1조에 의한 강력한 무역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밖에 없었다. "

1988년 '신동아' 2월호가 전한 부총리 시절 나의 미국 방문 성과, 아니 별무성과(別無成果)다. 당시 쇠고기.담배.보험 등은 한.미통상의 3대 현안이었다.

이에 앞서 전임 부총리 김만제(金滿堤) 현 한나라당 의원은 전년도인 87년 말까지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치르는 것을 전제로 미국측에 쇠고기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일종의 각서를 써 줬었다. 그런데 정치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총선이 다음해 4월로 넘어가고 말았다.

물러나는 5공 정부와 들어서는 6공 정부 사이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총선 공천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사람들과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당선자측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87년에 치렀다면 당연히 전대통령 몫이었겠지만 해를 넘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미국도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전년도인 87년 우리나라는 98억 달러의 대미 무역흑자를 냈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미 공화당 정부로서는 우리나라에 시장개방을 강력히 요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노당선자측은 총선 때 농촌표가 떨어지기 때문에 쇠고기 시장개방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총선 때까지 개방을 않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전대통령은 나를 불러 "전임 부총리가 한 약속이니 부총리가 가서 해결하라" 고 말했다. 노당선자는 "날 위해서 가는 거야" 하며 쇠고기 수입은 안된다고 못박았다. 퇴임을 앞두고 있던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간에 미묘한 시각차가 엿보였다.

미국의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후보 진영과 가까웠던 릴리 주한미대사 역시 우리 정부에서 누가 가 주기를 바랐다. 그는 미 정부가 한.미간의 통상 현안을 해결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했다. 내게 방미길에 부시 후보도 만나 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만의 하나 미국이 301조를 발동한다면 우리나라로서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재무장관 시절 제임스 베이커 미 재무장관과의 환율협상 때와 마찬가지로 '당장은 개방 못한다' 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여론은 여전히 시장개방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국내에서 코너에 몰린 채 미국에 건너가 흠씬 두들겨맞는 샌드백 같은 역할이었다. 한국과 미국 양쪽 모두 속죄양을 필요로 했다. 나는 무역마찰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차피 만화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을…. 개방이라는 대세에 비추어 훗날 어쩌면 선각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난여론이 빗발치겠지만 재무장관 시절의 부실기업 정리건으로 두들겨맞느니 통상마찰 문제로 욕 먹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 방문에 앞서 나는 오랜 친구이기도 한 최광수(崔侊洙) 외무장관을 만났다. 그는 개방은 어차피 시간 문제라며 아예 '총선 후 개방하겠다' 는 각서를 써 주고 오라고 말했다. 떠나는 부총리가 책임을 지고 정리해 주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쪽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각서를 써 주기로 합의했다.

그 해 1월 4일 클레이턴 야이터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난 나는 한국의 국내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각서를 써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단 조건이 있다고 덧붙였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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