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19번째 시집 '거울 속의 천사'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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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김춘수 시인이 19번째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5천5백원)를 펴냈다.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을 맞은 시인이 지난 2년간 쓴 89편을 엮은 것이다. 지난해 말 타계한 미당 서정주와 함께 김씨는 한국현대시사의 양대산맥이다.

미당이 조선 전래 정서, 한(恨)을 승화시켜 구원에 이르렀다면 김씨는 릴케의 순수서정과 실존철학.현상학 등 서구 시정신과 지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사물에 주어진 인간적 의미를 지워가며 사물을 사물 자체로 돌리는 해탈의 세계로 나갔다.

미당이 간 뒤 허허로운 한국 시단에서 김씨가 고령에 이렇게 많은 작품을 쓰고 또 편편이 긴장된 시어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며 선봉에 서 여전히 현대시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한국 현대시사의 은총이다. 기쁨이나 슬픔 등 인간적 감정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 없는, 하나의 사물이었던 그의 시가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슬프다.

"어릴 때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천사란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말은 낯설고 신선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릴케의 천사를 읽게 됐다. 릴케의 천사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그런 천사였다.

역시 낯설고 신선했다. 나는 지금 세번째의 천사를 맞고 있다. 아내는 내 곁을 떠나자 천사가 됐다. 아내는 지금 나에게는 낯설고 신선하다. 아내는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

김씨는 2년전 사별한 아내가 천사가 됐다고 한다. 그래 아내 천사의 입김이 89편의 시 모두에 스며 있다고 한다. 낯설고 신선한 천사.

구태의연함이 아니라 이 낯설고 신선한 천사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김씨는 지난 반세기를 끊임없이 시적 실험을 해 낯설고 신선함의 극치인 무의미시에 이르렀고, 아직도 그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세기 그의 시세계를 지배했던 호주 선교사네의 눈이 파란 소녀나 릴케의 천사는 관념의 낯선 순수였다. 그러나 지금 아내 천사는 육화된 친숙한 순수다.

"내 귀에 들린다. 아직은/오지 말라는 소리, 언젠가 네가 새삼/내 눈에 부용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불도 끄고 쉰다섯 해를/우리가 이승에서/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그것, /새삼 내 눈에 눈과 코를 달고/부용꽃으로 볼그스름 피어날 때까지, //하루 해가 너무 길다. " ( '대치동의 여름' )

아내가 죽을 병에 걸리자 김씨는 병원과 가까운 곳에서 좀 더 오래 간호하고자 서울 명일동에서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보낸 아내를 따라가고 싶으나 아직 오지 말라하니 하루 해가 너무 길다는 노시인의 시는 슬프디 슬프다.

그러나 그 슬픔을 시로써 헤프게 울지 않고 쉰다섯해 '살과 살로 익히고 또 익힌' 아내를 부용꽃으로 육화시켜 피워올리고 있지 않은가.

"미당이 늙은 아내/여든 넘은 아내/손톱을 깎아준다. /나사레의 예수/열병 앓는 젊은이 손을/꼭 잡아준다. /아침이 와서 바람과 햇살이/강아지 눈을 뜨게 한다. /엊그제 태어난 그 갈색 털의 강아지," ( '地上은' )

김씨는 관습이나 역사나 이데올로기에 묶여 살기 싫었다. 그것이 덧씌운 의미를 벗어던지고 순수 진공 상태에서 보이는 원초적 자유를 향해 시로 해탈을 꿈꿨다.

그래 사회적 삶에는 샌님이었다. 사회적 삶은 아내가 대신 살아줘 김씨는 평생을 순수하게 시에 매달릴 수 있었다. 선비적 엄결성으로 하여 미당처럼 다정다감하게 늙은 아내의 손톱을 깎아줄 수 없었다.

그런 아내가 떠나자 이제 미당을 빌려 손톱을 깎아주며 시에 따스한 피가 돌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어떤 것에도 물들일 수 없는 순수 그 자체를 놓친 것은 아니다.

"바다는 흘러 어디로 가나/가나, /그런 해조 뒤로 숨어버릴라, /아니 아니/바다는 온몸으로 수평선을 만들고 있다. /그 너머는 아른 아른/가지 못하게," ( '해조(諧調)를 위하여)

김씨의 시는 수평선 그 너머까지 가려했다. 시에서 완전히 의미를 지워버리는 무의미시로, 시의 이해를 통한 독자와의 소통을 처절하게 차단하며 홀로 저 수평선 너머의 해탈의 세계를 보여주려다 그 무의미의 수평선에 익사했다.

그러나 다시 위 시 제목처럼 해조, 즉 모두 다 잘 조화되기를 위한다며 이제 최소한의 소통을 위한 의미를 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 의미 너머 순수의 세계가 독자의 마음 속에도 아른아른 와 닿지 않는가. 그러나 많은 시인들이 수평선 그 너머까지 보여주려 한다.

우주가 닫아놓은 순수의 세계까지 의미나 감상의 과잉으로 덧칠하며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후배 시인들을 김씨는 시집 마지막에 놓은 '품을 줄이게' 란 시로 꾸짖고 있다.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두게. /훌쩍 뛰어 넘게/모르는 척/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품을 줄이게/시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그 자국이니까"

지난달 한 문학행사에서 김씨는 2백여명의 시인과 시인 지망생 앞에서 시에 대해 말했다. 짧게 인사말만 해달라고 했는데 꼿꼿이 서서 장시간 강연할 정도로 심신은 건강하다.

요즘도 한달에 4~5편의 시를 문예지에 발표할 정도로 창작욕도 넘쳐난다. "아직 더 가야 할 시세계가 멀다" 며 오늘도 산책의 구상과 원고지의 집필로 시의 순수한 먼길을 걷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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