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일본 '3중갈등' 심상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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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국이 대만 분리독립운동의 배후로 지목해온 리덩후이(李登輝)전 대만 총통의 방일이 20일 결정돼 중.일간의 외교적 마찰이 불가피하게 됐다.

일본 정부는 이날 밤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 는 조건을 붙여 李전총통에게 사증(비자)을 내주었으며, 이에 따라 그가 22일 오사카(大阪) 간사이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할 것이라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보도했다. 李전총통은 24일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시에서 심장수술을 받게 된다.

중.일간에는 현재 李전총통의 방일 외에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 중국산 농산품에 대한 일본의 긴급 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발동 문제도 걸려 있어 양국 관계는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됐다.

1998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방일 때 과거사 공세를 펼쳐 급속히 냉각됐던 양국 관계는 99년 이후 다소 회복 조짐을 보였으나 이번에는 과거사.무역.외교 문제가 한꺼번에 꼬여 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최근의 양국 갈등 양상은 강경 보수로 치닫는 일본쪽의 공세가 특징으로, 중국이 어떤 대응 카드를 빼들지 귀추가 주목된다.

◇ 리덩후이 방일〓李전총통에 대한 사증 발급은 일본의 대만 창구인 교류협회 타이베이(臺北)사무소에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이에 대해 일본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기 위해 손을 잡는 것으로 보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대만 분리독립운동을 펼쳐온 李는 '자연인' 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과의 군용기 충돌사건 협상으로 눈코뜰 새가 없는 틈을 타 일본이 李에게 비자를 발급한 조치에 격분하는 모습이다.

중국은 20일 "李의 방일은 신병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중국 분리독립운동이 진정한 의도" 라며 일본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중국은 지난 16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李의 방일 반대 의사를 천명했고 17일엔 외교부 아주사(亞洲司) 청융화(程永華)부국장이 베이징(北京)주재 일본 특파원만을 상대로 긴급 기자회견까지 열었었다.

李의 방일이 허용되면 앞으로 대만 분리독립파의 활동도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강경 대응은 불 보듯 뻔하다. 베이징 소식통들은 95년 李가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중국이 주미대사 리다오위(李道豫)를 소환한 전례를 들어 중국이 이번엔 천젠(陳健)주일대사를 소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한다.

◇ 무역 마찰〓일본이 중국산 파, 표고 버섯, 다다미 제작용 왕골 등 3개 농산품에 대해 긴급 수입제한조치를 내린 데 대해서도 중국은 분개한다. 특히 일본이 장어.미역 등 수산물과 수건 등 각종 품목에 대해 비슷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어서 무역 분쟁은 불가피한 상태다.

일본은 겉으로 농어민 보호를 위한 조치라고 말하고 있으나 점차 확대되는 중국과의 무역수지 적자 대책인 것으로 중국은 분석하고 있다. 중국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대(對)일본 수출은 4백16억달러, 수입은 4백15억달러로 1억달러의 흑자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 통계는 중국이 일본에 5백53억달러어치를 수출하고 3백4억달러어치를 수입, 중국측의 흑자 규모가 2백49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돼 있다.

중국은 일본이 이를 이유로 점차 세이프가드 발동을 늘릴 것으로 본다. 중국 대외경제무역합작부 가오옌(高燕)대변인이 일본의 이번 조치는 중.일 무역관계를 엄중하게 손상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일본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다.

高대변인은 중국이 보게 될 손실에 대해선 중국이 향후 조치를 취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상의 보복을 예고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다만 일본과의 무역분쟁이 서부대개발을 비롯한 장기 경제개발 목표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부담이다.

◇ 교과서 왜곡〓주룽지(朱鎔基)총리는 20일 한국 양승택(梁承澤)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교과서 문제와 관련, 고충을 털어놓았다. "한국이 잘 대응하고 있다" 면서 "중국은 인민들의 반일 감정이 워낙 격해 이를 자제시키고 있는 상황"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중.일 양국의 관계를 중시해 인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를 써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 언론들이 한국의 반일 운동을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도대체 중국은 무엇하느냐" 는 여론이 높아 중국 정부의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있다. 중국은 역사 문제는 중.일 수교의 정치적 토대라고 말해 왔다. 양국간의 냉기류는 좀처럼 걷히지 않을 전망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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