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자신의 상황에 철저할 뿐 밖을 넘보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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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 08면

현대 번안어들이 득세하면서 옛 한자어들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거의 예외 없이 의미가 달라지고, 엉뚱한 맥락에 재배치되었다. 억울하게 명예를 잃고 가치가 뒤바뀐 것들도 부지기수. 가령 ‘횡설수설(橫說竪說)’이 그 하나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 <5> -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1. 언설의 최고 가치는 ‘횡설수설’
다들 “조리도 중심도 없이 지껄이는 술 취한 소리”로 알고 있다. 사전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원래는 이렇게 남루하거나 천덕스럽지 않았다. ‘횡설수설’은 횡설과 수설의 자유자재로서 모든 언설이 닿고자 하는 전범 혹은 최고치를 뜻했다. 율곡의 『성학집요』 총설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성현의 설 가운데는 혹은 ‘눕히고(或橫)’ 혹은 ‘세운(或竪)’ 것이 있다. 한마디로 설계(體用)를 보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사건을 자세하게 언설한 것도 있다.” 땅에 박는 말뚝을 연상하면 좋겠다. 구체적 사례에 집중한 것이 ‘세운 말(竪說)’이라면 일반화와 정식화는 말뚝을 ‘드러눕힌 논의(橫說)’에 해당한다! 르포나 소설에서는 말을 세우고, 철학이나 수학은 말을 눕힌다. 하나를 잘 하기도 어렵지만 둘을 겸전(兼全)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실의 구체성에만 사로잡히면 역사의 교훈이나 법칙을 얻기 어렵고, 하늘만 쳐다보고 걷는 철학자는 도랑에 발을 헛디디기 쉽다.

대학의 로고에 가령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걸기보다, 추상적 개념들을 나열해 놓기보다 ‘횡설수설’이라는 표어를 적어두면 어떨까 하고 홀로 웃은 적이 있다. 학문과 지식의 이념이면서 역설과 긴장의 재미도 주지 않는가. 아마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개그콘서트로 알고 밥알을 튀길 것이 틀림없겠지만….

2. 유교와 노장, 우주 보는 시각 같아
각설, 유교의 ‘횡설’은 『중용』 첫머리에 있다. 거기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다음과 같다. “중화(中和)를 이룩하자. 그때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萬物)이 생육 번성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이 표어를 이해하자면 설명이 필요하다. 동아시아는 자연, 인간, 사회를 연관된 전체로 읽는다. 우주를 상호작용의 시스템으로 인지하는 점에서 유교와 노장(老莊)이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노장은 이 시스템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비해, 유교는 ‘작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픽스하자면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개선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인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유교는 노장과 맞서고, 점진적 개선을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와 결별한다. 그래서 왈, 이기(理氣)론이다. 노장은 기(氣)로 충분하다 하는데 유교는 불완전함과 긴장, 벌어진 틈새가 마음에 걸려 다시 이(理)를 호출했다.

그 간극, 혹은 타락이 원죄는 아니라는 것도 기억하자. 예외적으로 ‘완전히’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 데다, 이 틈이 은총으로 메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에서 그렇다. 관건은 개인의 자각과 실천이다. 그래서 왈, 수기(修己), 혹은 수양(修養)이 유교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인간은 본래의 ‘고향’으로부터, ‘완전’으로부터 멀어진 것일까. 일차적 틈은 유전적 결정이다. 이차적으로는 환경과 습관, 교육과 직업 등이 간여한다. 유교는 사람들의 출발이 서로 다르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자질과 능력은, 지적이든 도덕적이든 간에, 평등하지 않다.” 그에 따라 들여야 할 노력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3.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
사람들은 각자 조금씩 제자리에 있지 않다. 어딘가 어긋나 있으니 1)딴 데 서 있거나(偏), 2)삐딱하게 기울어져(倚) 있다. 이 상태에서 자극이 오면 1)엉뚱한 반응을 하고, 2) 충분하고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문제 상황이다. 뒤틀린 마음바탕(性)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혹 지나치거나 모자란 성향이 예측되면 즉각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을 중(中)이라 한다. 이 바탕이 없이 반응의 적절성, 행동의 건전성(和)은 기약할 수 없다.

주자는 말한다. “자기 주시를 통해 고요의 극점에 들어서면 치우치거나 기울어짐(偏倚)이 없는 중(中)을 얻는다. 그와 더불어 천지가 제자리를 찾는다. 의지와 정서의 반응을 세밀하게 성찰하게 되면 교제와 응접이 적절해지는데, 그 화(和)를 밀고 나가면 그와 더불어 만물이 생명과 활기를 얻는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자는 덧붙인다. “천지 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이다. 내 마음이 올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역시 올바르고, 나의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 또한 순해진다. 학문은 이 경지를 성취하자는 것이고, 성인 또한 이 과업을 성취하신 분이다.”

4. 거창한 구호는 공염불일 뿐
내가 중심을 확보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는다. 그 위상 하에서 관계가 풍성해지고, 주변은 번성한다. 율곡은 이 범주가 크고 작은 동심원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천지만물이 어디 우주적 차원의 거시를 한정한 말이겠는가. 한 가정에 부부와 자식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 한 천지이고, 거기서 우애와 공경, 사랑과 존경이 피어나는 것이 바로 한 만물이 생육하는 기상이다.” 직장, 학교에서 한 사회, 국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천지 정위(天地位)’와 ‘만물 육성(育萬物)’이 있다!

율곡은 “한 가정에서 이를 성취한 적은 있으되 국가적, 나아가 지구적 차원에서의 성공은 적막하게도 없었다”고 탄식했다. 임금을 분발시키고자 한 말이니 너무 겁낼 필요는 없겠다. 각자 자신이 처한 위상과 관계망, 처리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구체성을 잃지 않는다. 미시적 노력들의 협화(協和) 없이 세계평화 등의 거창한 구호는 공염불이거나 기만이다. 『중용』은 말한다. “군자는 다만 주어진 역할과 처한 상황에 철저할 뿐, 그 밖을 넘보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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