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실패를 배우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통령학을 전공하는 고려대 함성득(咸成得)교수는 지난해 2학기에 '김영삼정부 심포지엄' 을 열었다. YS를 포함해 그를 보좌했던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총리와 장관들이 강의에 나와 YS 국정운영의 성공과 실패를 회고하고 학생들과 질의 응답을 갖는 자리였다. 이 심포지엄을 책으로 정리해 엮어낸 것이 『김영삼정부의 성공과 실패』 다. 그 중 YS정부 비서실장을 지낸 한승수(韓昇洙)현 외교통상부장관의 회고가 현 시점에서 돋보인다.

*** 독선 부르는 이분법 사고

그는 YS시절 나타난 국정운영의 특징적 현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가 단절(斷絶)현상이다. 새로 등장한 정치발전.민주화 세력이 전 정권의 근대화.산업화 세력과 대치 또는 단절되는 현상이다.

YS정권에서 '박정희 향수' 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민주화세력이 산업.경제 발전에 뚜렷한 청사진을 갖지 못함을 국민이 알게 되면서 그 역작용이 일어난 것으로 풀이했다.

둘째, 패러독스 현상. 개혁을 하면 할수록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더 떨어지는 모순 현상이다.

셋째, 토네이도 효과. 토네이도란 개혁주도 세력이 일으키는 회오리 바람을 뜻한다. 초기엔 그나마 검찰권을 휘둘러 개혁세력이 도덕성을 확보하지만 정권교체기에 오면 그 도덕성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정치.경제적 충격과 불안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넷째, 개혁 과신 현상. 개혁의 강도는 대통령의 잔여임기와 정(正)의 함수관계여야 하는데 떨어지는 지지도를 만회하기 위해 역(逆)방향으로 가는 현상이다. 끝으로 누워서 침 뱉기 현상. 앞 정권의 잘못을 극대화해 홍보하는 현상이다.

실패란 값진 것이다. 그러나 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실패를 성공의 교훈으로 삼지 못할 때 그 실패는 또 다른 실패를 부를 뿐이다. 인간이란 똑똑한 듯하면서도 앞선 사람이 빠진 함정에 어김없이 또 빠져드는 어리석음을 거듭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흔하게 봐왔다. 아니 지금의 현실 속에서도 보고 있다. 그래서 실패의 연구는 흥미롭다.

기이하게도 문민정부를 실패로 몰고간 다섯 현상들은 오히려 현 정부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며 예사롭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단절, 패러독스 현상, 토네이도 효과, 개혁 과신, 누워 침 뱉기 현상이 겹치기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회오리 바람이 돼 휩쓸고 있다.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했다는 이유로 모든 앞선 정권은 배척과 단절의 대상이 됐다. 같은 민주화 세력이었지만 YS정권은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실패한 정권이었다. 과거와의 단절 현상은 개혁세력의 오만과 독선을 부추긴다.

모든 과거세력은 반개혁 기득권 세력이고 배척의 대상이 되며 개혁세력만이 민주적이고 정치발전 세력이라고 믿는 독선을 자초한다. 이런 오만과 독선이 개혁 과신을 낳고 그것이 패러독스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의약분업과 교육개혁 같은 개혁실패로 귀착된다.

DJ정부의 개혁 방식은 개혁과 반개혁의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타도할 적을 먼저 상정한다. 의료개혁에선 의사가, 교육개혁에선 교사가 주적(主敵)이었다. 그리고 언론개혁에선 중요 언론이 타도 대상이다. 타도 대상이 선정되면 토네이도가 불어온다. 개혁주체여야 할 교사.의사.약사.언론인을 개혁대상으로 삼고 정권의 개혁세력이 개혁주체가 된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나 개혁과 변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혁이 독선과 오만, 이분법적 타도로 치우칠 때 개혁과 반개혁의 갈등과 마찰은 불가피하게 일어나고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또다른 개혁 토네이도를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 개혁 할수록 지지도 추락

그래서 개혁을 하면 할수록 개혁세력의 지지도는 추락하는 모순현상이 일어난다. 이미 우리는 개혁 과신과 모순 현상을 YS시절 지겹게도 학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정부 또한 교육.의료개혁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이른바 언론개혁이란 새로운 토네이도를 조세권과 법령개정까지 불사하면서 몰아가고 있다.

지금은 金대통령 집권 4년차다. 집권초기의 개혁성과와 실패를 차분히 검토하고 개혁의 과신과 토네이도 효과, 패러독스 현상을 되짚어 볼 때다. 韓전비서실장이 회고했듯, YS 3년차 때 그의 인기가 69.8%였고 지금 DJ인기도는 35% 미만일 것이다.

실패한 개혁을 만회하기 위한 개혁, 레임덕 차단을 위한 강한 정부, 3당연합을 통한 강한 정치, 이 모두가 떨어지는 지지도를 만회하기는 어렵다는 게 지난 정권의 교훈이다. 영명한 지도자는 지지도나 인기도에 연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앞서 간 사람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는 최소한의 지혜는 갖춰야 할 것이다. 실패를 배우자.

권영빈 <본사 주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