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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42. 안기부장 부탁 거절

강경식(姜慶植) 재무장관(현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을 찾아간 나는 취임 후 첫 임원 인사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어디 보기나 합시다. "

봉투를 열어 본 그가 한 마디 했다.

"알아서 하십시오. "

그 때 봉투를 열어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도 강장관은 임원 인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외환은행에 관한 한 인사에 관여하지 않은 첫 재무장관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임 김만제(金滿堤) 장관(현 한나라당 의원)도 임원 인사와 관련해 어떤 지시도 한 일이 없다. 두 장관 덕에 나는 재무부의 인사 관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후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재무장관이 된 나는 은행장이 인사안을 들고 오면 야단을 치다시피 해서 돌려보내곤 했다.

재무장관 시절 나는 안기부장의 인사 청탁도 들어 주질 않았다.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현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아니 안기부장 부탁도 안 들어 줄 거냐" 고 했지만 "그러면 나 스스로 공언한 원칙이 무너진다" 며 거절했다.

당시 안기부장이라고 하면 권력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말 그대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자리였다. 막상 거절을 하고 나니 마음 속으로 적이 걱정이 됐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안기부장의 청탁도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 뒤로는 아예 청탁을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바람에 나는 은행 임원 인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내각에 있는 동안 안기부장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도와 주었다. 그의 이런 면모는 나로서는 그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외환은행장으로 있을 때 나는 또 일선 점포들을 많이 돌았다. 취임 직후 해외 점포를 포함해 단기간에 전국의 점포들을 둘러본 뒤로도 평일 오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수시로 담당 부장, 비서와 함께 아무 점포나 불쑥 들르곤 했다.

특히 해외 출장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이 때문에 해외 출장 때 수행한 비서가 돌아오면 입원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일선 지점장들이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고객을 몰고 다니는 것은 당시 은행가와 기업인간 합승(合乘) 케이스의 모델과도 같은 해묵은 관행이었다. 단적으로 고객들은 이미 강남으로 옮겨갔는 데도 도심의 '명문' 점포들은 여전히 이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점포별 영업 실적이 경제의 실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심지어 시중은행의 일부 지점장들은 은행 안에 은행을 차려 놓고 있다시피했다. 이런 폐습은 금융 사고의 원인으로 잠복했다.

그런 마당에 거래선 이관 방침은 해당 점포들로서는 큰 쇼크였다. 이 때문에 반발도 심했다.

나는 지역에 관계 없이 고객을 붙잡고 있는 것을 합승 케이스로 간주하고 거래선 이관을 꾸준히 독려했다. 나는 "우리의 고객은 우리 은행의 고객이지 지점장 개인의 고객이 아니다" 라고 강조했다.

이런 노력은 은행감독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됐지만 지금도 이같은 관행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내가 외환은행장으로 있을 때 전임 행장들의 '평균 수명' 은 3년이 채 안 됐다. 1년 7개월여 재임하고 나는 은행감독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외환은행과 나의 인연은 재무부 사무관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서울사세청 근무를 마치고 본부에 복귀한 나는 당시 외환국에서 법규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때 나는 외환은행법 초안을 작성했다.

미군정 시절 우리나라엔 조선환금은행이 있었다. 외환은행의 전신격이었던 이 은행은 그 후 한국은행이 설립되며 중앙은행에 통폐합됐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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