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난조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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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밖으로는 국가적 체면과 신용이 흔들리고, 안으로는 도처에서 난조(亂調)와 파탄의 불길한 징조가 나오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은 어떻게 됐기에 "부시 대통령이 면전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뺨을 때린 격" 이란 논평이 나왔을까. 미국신문들이 뒤늦게 金대통령을 홀대하고 수모를 준 것은 부시의 잘못이라고 비판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金대통령이 '홀대' 와 '수모' 를 당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 국정 파탄.사회분열 심각

金대통령이 북한문제로 그렇게 수모를 당했는데도 북한은 거꾸로 金대통령을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고 있다. 예정된 장관급 회담을 돌연 이유설명도 없이 무산시켰으니 북한을 믿기 어렵다고 한 부시 말을 북한 스스로 사실로 증명해준 꼴이다.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선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의 유지.강화를 천명해 놓고 미국에 가서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우리 외교관이 무슨 낯으로 러시아관리들을 대할지 그것도 걱정이다.

이를 두고 한 일본신문은 金대통령이 '팔방미인' 외교를 한다고 꼬집었다. 미국에서 터지고 북한에 당하고 러시아엔 신용을 잃었으니 이러고도 대외적으로 국익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우리의 대북정책은 어디로 가야 할까.

국내상황을 보면 더욱 암담하다. 분통 터지고 가슴 답답하고 속터지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의료보험재정의 파탄은 정부.여당의 졸속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의약분업을 한다고 설익은 개혁을 무모하게 추진하다 빚은 참극이다. 내각제 국가라면 벌써 내각총사퇴.정권퇴진 소리가 나오고도 남을 문제다. 국민에게 미안하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무슨 해법(解法)이 있는지 어떤 책임을 질는지 말해야 한다. 만만한 장관 하나 교체로 시치미를 뗄 일이 아니다. 교육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절망상태에 빠졌고, 실업자는 늘고 공적자금은 아직도 모자란다고 한다. 현대그룹에 얼마를 더 퍼넣을는지, 인천국제공항의 불안은 언제나 해소될지, 금강산관광은 어떻게 되는지, 가슴 답답한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하나같이 해결책은 안보인다.

이런 가운데 사회를 갈가리 찢는 분열.갈등현상은 끝모르게 치닫고 있다. 신문이 신문을 고소하고, 정당이 정당을 고소하고, 신문이 방송을, 방송이 신문을 고소한다. 신문이 정당을 고소하고 정당이 신문을 고소한다. 역대정권에서 이런 일을 보았는가.

왜 DJ치하에서 이런 일이 이렇게 심한가. 심지어 검찰총장이 고소당한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국세청은 인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수백개 신문지국.보급소까지 덮친다. 이렇듯 열성적이고도 대규모적인 세무조사를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국난(國難)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상황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정치엔 절망했고 교육에도 이젠 절망했다. 경제에선 내 먹을 건 내가 챙겨야지 하는 극도의 보신주의.이기주의가 있을 뿐 더이상 국가정책을 믿지 않고 있다. 정부의 문제해결 의지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실제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정치권을 보라. 소위 '대권주자' 는 많지만 그들이 뭘하고 있는가. 그들 입에서 국민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말을 들을 수가 있는가. 몇십조원의 국민부담이 가중돼도, 사회분열과 갈등이 심화돼도 그들은 관심도 없다.

그저 A지역+B지역의 지역주의.사람얽기만 생각한다. 최고지도자라 할 DJP회동이 있은 후에도 나오는 소리라곤 선거요 '대권' 뿐이다. 최고지도자라면 나라의 큰 현안과 민생부터 논의하는 것이 당연한데 속으론 천하태평의 묘계라도 논의했는지 모르겠으되 밖으로 나온 소리만으론 너무 실망스러웠다.

민주당이 자민련에 꿔준 한 의원이 "…대통령님을 향한 한마리 연어가 되겠다" 운운한 낯간지러운 과잉충성으로 말이 많지만 집권측의 누가 그를 꾸지람이라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니, 혹시 내막적으로는 '장하다' 고 어깨를 두드려 줬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일본경제의 침몰은 일본의 정치 때문이라고 하는데 우리인들 다를까. 정치가 민심과 유리(遊離)된 지 오래고 과잉충성이 공공연히 나오며 서로 물고 뜯는 사회갈등이 치열한 이런 심상찮은 일들이 과연 무슨 조짐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정말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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