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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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5. 은행장도 하기 나름

내가 은행에 융자위원회.인사위원회를 최초로 도입한 것을 두고 당시 나더러 "융자에 관한 권한에 인사권까지 내주면 은행장은 뭐하러 하느냐" 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은행장이란 본래 은행을 경영하고 대외적으로 은행을 대표하는 자리다. 20년 전 이미 외국 은행의 체어맨이나 은행장들은 융자에 관여하지 않았다. 행장이 일일이 여신 결정을 할 필요도 없었지만 물리적으로 행장이 다 처리할 수도 없었다.

나는 융자위원회를 가동하면서 위원들에게 충분히 토론을 벌이도록 했다. 융자위원회를 마치고 나면 별의별 얘기가 들렸다. 어느어느 건은 누구누구의 청탁이라는 얘기까지 귀에 들어왔다. 누가 장난을 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융자위원회 덕에 융자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은행 초년생인 나도 웬만큼 알게 됐다.

융자위원회가 틀이 잡히자 처음에 주저하던 참석자들도 나중에는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했다. 그러다가도 내가 들어가 의장석 뒤에 앉아 있으면 저마다 내 눈치를 보느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물며 행장이 융자와 관련해 무리수를 두었다면 누구도 말을 안 했을 것이다.

은행장이 내린 결정에 대해 잘못했다고 말할 사람이 적어도 은행 안엔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들리면 '나도 알고 있다' 고 넌지시 암시만 해도 시정되었다.

당시 내가 융자.인사 위원회를 둔 것에 대해 "행장이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고 꼬집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감이 없지 않았다. 한 마디로 위원회는 외부의 압력을 차단하는 데 유용했다.

그때만 해도 산지사방에서 이런 저런 융자 청탁이 들어왔다. 행장으로서 다 들어 줄 수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그 때마다 거절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탁을 넣는 쪽은 대부분 목소리가 크거나 힘있는 사람들이었다. 위원회 석상에서 외부의 청탁이 있었음을 내비치면 위원들은 알아서 '안 된다' 고 반대했다.

인사란 더욱이 사람의 팔자를 바꿔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사는 어쩌면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사자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인사권자는 신을 대리하는 것이다. ' 인사할 때마다 나는 기도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인사위원회에 맡겨 놓았더니 문제가 저절로 풀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인사를 공정하게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또 점포조정위원회를 만들었다. 관계부서장들이 참석하는 점포조정위원회는 점포의 필요성을 철저히 점검함으로써 은행 경영을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다. 적자 점포에는 말미를 주고 수익을 내도록 유도했다. 그랬더니 지점에서 알아서 구조조정을 했다.

건물을 새로 짓는 건물주들이 치열하게 은행 지점 유치 로비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은행이 들어오면 융자를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점들은 지점들대로 2~3개 층을 쓰는가 하면 자체 구내식당을 만들었다. 빈 방에는 탁구대 등을 들여 놓았다. 무작정 크게 차지하고 넉넉히 쓰는 게 좋은 줄로만 알던 때였다.

임대료를 따져 보니 도심의 경우 점포 바닥에 몇 센티미터 두께로 금을 입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내식당의 우동 한 그릇 원가가 20년 전 1만몇천원이나 했다. 하루 5천원만 식비를 보조하면 밖에 나가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산책도 즐길 수 있는데.

위생 상태도 엉망이었다. 젖은 마루바닥엔 우동그릇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저런 데서 먹고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개밥을 먹일 참이냐" 고 다그쳤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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