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설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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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당신의 입 안에 들어 있는 한, 말(言)은 당신의 노예다. 그러나 입 밖에 나오면 당신의 주인이 된다' 는 이스라엘 속담이 있다. 우리 속담도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고 경고한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 는 다변(多辯)옹호론도 있지만, 한번 뱉은 말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 더 빨리 퍼지고 취소할 수도 없다는 '사불급설(駟不及舌)' 을 선인들은 더 경계했다.

설화(舌禍)를 당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대강 세가지. 논리를 더 보태 '소신' 을 그대로 밀고나가든가, 발언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부인하며 빠져나가든가, 아니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법적 책임을 당시 유아(幼兒)이던 김정일 위원장에게 물을 수 없다" 는 요지로 발언했다가 민주당 국가경영전략연구소 부소장직을 사퇴한 황태연 교수는 첫째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새로 보탠 논리라는 게 기껏해야 둔사(遁辭)수준을 넘지 못해 아쉽다.

1961년생인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여)중의원 의원은 몇년 전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나는 전쟁의 당사자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반성하지 않을 것이며, 반성을 요구받을 이유도 없다" 고 말해 일본내에서조차 '전후세대 정치인의 한심한 역사관' 이라고 비판받았다. 黃교수의 말대로라면 다카이치의 궤변도 옳다는 얘기인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며칠 전 주한 일본특파원들과의 저녁 술자리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겨냥해 '바카야로(馬鹿.일본어 욕설)' 라 했다 해서 파문을 불렀다. 그는 이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 없다" 고 둘째 방법으로 대응했다.

사실 金명예총재와 동석했던 몇몇 일본특파원들도 기자에게 "그런 말은 들은 기억이 없다" 고 털어놓았다. 오히려 다른 여권 정치인을 향해 '칙쇼(畜生.×자식)' 라는 더 험한 말을 내뱉은 기억은 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말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겠지만 말을 옮기는 쪽도 당시 정황을 십분 헤아리고 보다 정확을 기해야 한다는 교훈이 남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을 전후해 남북간 '과거사' 라는 민감한 화두가 계속해 많은 말들을 생산할 것이다. '정치의 90%는 말로 이루어진다' 는 말도 있다. 치고 빠지고, 으르다가 눙치고, 문제가 생기면 교언(巧言)으로 에두르는 말버릇을 지도층부터 삼가야겠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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