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추억] 독립운동가 고 송남헌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지난 20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송남헌(宋南憲)옹은 평생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걸었다.그는 일제 하에서는 독립을,해방 후에는 민족의 단결과 분단의 극복을 위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결코 순탄할 수는 없었지만 뜨겁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고인의 회고록을 썼던 경남대 심지연(沈之淵)교수는 “선생은 역사무대의 전면에 서보거나 한번도 각광을 받지 못했지만 언제나 치열한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 했다”며 “고인의 삶에는 우리 민족의 삶이 압축돼 있다”고 평했다.

◇일제시대=일제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웠던 1940년초.대구사범을 졸업한 고인은 서울 재동국민학교 교사 겸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다.

을지로 입구의 ‘납짝집’에서 막걸리 한사발에 울분을 삭이거나 명동에 있는 다방 ‘티룸엘리자’에서 15전하는 커피에 10전하던 미도리 담배를 피우며 러시아 민요 ‘글루미 선데이’를 종일 듣곤 했다.그것이 생전 宋옹이 회고한 대로 ‘암울한 시대의 우울한 초상’이었다.

당시 그기 출연했던 경성방송국에서는 방송국 근무자들이 조립한 엉성한 단파라디오가 있었다.그 리디오는 독립의 꿈을 이어주던 가느다란 희망의 동앗줄이었다.

고인은 이를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황과 광복군의 전과를 주위에 전했다.

42년 6월에는 “동포들이여,조국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일제에 대한 일체의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이승만 박사의 떨리는 육성을 전하기도 했다.

2년 가까이 단파방송 내용을 주변에 전하는 일을 하던 고인은 일경에 체포돼 1년6개월간 첫번째 옥고를 치렀다.그동안 국제정세는 급변해 4년 6월 출소 후 1년여만에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정국=해방공간에서 그는 평생 정신적 지주가 된 김규식(金奎植)박사를 만나 비서실장으로서 그를 그림자처럼 보좌하며 좌우합작 운동에 뛰어들었다.

47년 8월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고 분단정부 수립이 현실로 대두하자 김규식 박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했고 고인은 두 지도자와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하지만 이 역시 무산되면서 냉전체제는 굳어져 갔다.

북한은 남한으로 특사를 보내 고인을 통해 김규식 박사에게 김두봉의 편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고인은 접수를 거절했다.하지만 반국가단체 특사를 만나고 신고하지 않았다는(불고지죄)혐의로 구속됐다.

◇분단이후=한국전쟁이 터졌으나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金박사와 함께 서울에 남아 있던 고인은 인민군이 金박사를 강제납북하는 과정에서 북행차량에 동승했다.

그러나 차량이 막 출발하기 전 金박사의 부인인 김순애 여사가 “병든 남편을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애원하는 바람에 고인은 차에서 내리고 곁에 있던 비서 신상봉씨가 북으로 향하게 됐다.

고인이 생전 뒤바뀐 운명을 두고두고 짐스러워했다.

극적으로 납북은 면했으나 4·19,5·16으로 이어지는 격랑 속에서 고인은 세번째 옥고를 치른다.

군사정부가 4·19이후 윤길중씨 등과 혁신정당(통일사회당)활동을 하던 고인을 좌익으로 몰았던것.

출옥후 宋옹은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현대사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해방정국의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해방3년사’는 현대사 연구를 촉발한 역작이다.

그는 가까운 사람이 친일 색채가 있다고 해서 평생 의절할 만큼 엄격했지만 허름한 옷을 입고 취재하는 기자에게 가족이 입던 양털코트를 갖다줄 정도로 정이 많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까지 됐는데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宋옹은 '미완'으로 끝내 인생에 대해 회한을 갖지 않았다.

“가난과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내가 뒤따라 걸었듯이 누군가 내가 걸었던 길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뒤따를지도 모른다.내가 걸어온 것보다 한발짝이라고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므로 이제 내가 쉰다고 해도 별반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고인은 지난해 가을부터 기력이 쇠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며느리들이 불러주는 판소리를 들으며 고단한 생을 편안히 마감했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

강민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