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모녀피살 대법·고법 '핑퐁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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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법원이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재판에서 '간접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안된다' 는 증거재판주의의 목청을 높였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李鍾贊부장판사)는 1995년 아내와 딸을 목졸라 살해한 뒤 불을 지른 혐의로 기소된 이도행(李都行.39.의사)씨에게 지난 17일 다시 무죄 선고를 내렸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 파기환송된 李씨에 대해 "유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며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 취지 환송심에서 무죄 판결을 한 것은 이례적이다.

◇ 증거재판주의 천명〓95년 6월 서울 은평구 불광동 李씨의 아파트에서 李씨의 아내(당시 31세.치과의사)와 한살배기 딸이 목졸려 살해됐다. 검찰은 3개월여의 수사 끝에 李씨를 범인으로 지목,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아내와 불화가 있었던 李씨가 당일 새벽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오전 7시 출근 직전 불을 질렀다" 며 ▶화재발생 시간▶살해 동기▶시강(屍剛.시체의 굳은 정도)과 시반(屍斑.시체에 생기는 반점)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을 증거로 들었다.

그러나 17일 재판부는 이들 증거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李씨가 출근 직전 불을 질렀는데 오전 8시40분에야 화재가 목격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고 밝혔다.

또 "시강과 시반에 대한 견해는 법의학자들마다 달라 이를 근거로 피해자들이 李씨 출근 전 사망했다고 볼 수 없다" 고 했다.

李씨와 아내 사이의 불화가 심했다는 점도 "가족들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인정할 수 없다" 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전망〓이번 판결은 "유죄 증거가 확실치 않을 땐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한다" 는 형사법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특히 "정황증거만으로 기소한 사건에 대해 법원은 더 엄격히 판단할 것이며, 앞으로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사가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법의학자들이 검찰의 지휘를 받는 한국의 검시(檢屍)제도와 법의학계의 문제점도 제기했다.

이 사건은 검찰이 재상고 의사를 밝혀 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됐다.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면 무죄가 확정된다.

그러나 다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는 '핑퐁 재판' 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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