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白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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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의 눈은 평판이 나쁘다.

흰 눈은 아황산가스에 오염된 산성물질, 출퇴근길 교통전쟁의 원흉, 보행자의 부상을 유발하는 귀찮은 존재쯤으로 취급당한다.

며칠 전 중부지방에, 지난달엔 남부지방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피해도 만만찮다.

중앙재해대책본부는 올해 눈으로 인한 피해액을 7천억원이라고 추산했을 정도다.

하지만 눈이 내리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온갖 상념에 젖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시인은 노래했다.

"문을 열고 내어다 보면/천지는 아득한 흰 눈발로 가리워지고/보이는 건 흰눈이 흰눈으로 소리없이 오는 소리뿐. /…/허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박정만 '오지 않는 꿈' )라고.

눈은 화사한 축복이었다.

"화사하셔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아침은/온 산, 온 경치가 새하얀 이 아침에 온통" (김정환 '눈 나뭇가지, 너, 나 그리고 고통' )

또 눈은 정갈함이었다.

"저 눈은 너무 희고/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박용철 '눈은 내리네' )

때론 무심함이기도 했다.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는 돌다리에/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그늘에/귀 기울여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

드물게는 징그럽기도 했다.

"남산 계단의 흐린 불빛 위로 뭉턱뭉턱 쏟아져내리는 서울의 밤눈은, /나의 벌려진 구두 안창으로 벌레처럼 기어드는/" (백학기 '한강' )

하지만 대개는 그리움이었다.

"눈이 쌓여서 아직 얼지도 녹지도 않아 부드러울 때, 나의 가벼운 입김으로 후 불면 흩날리어 세상의 아주 먼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반짝이는 가벼움으로 나는 하루종일 그대 생각을 한다" (원재훈 '아름다운 세상' )

무엇보다 청천 김진섭은 '백설부' 에서 이렇게 적었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듯하고, 눈오는 날에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이는 통행인은 보지 못했다. " 하지만 이제는 "환호성을 지르는 통행인은 보기 어렵다" 고 바꿔 적어야 할 것 같다. '백설부' 가 씌어진 때로부터 벌써 50여년이 지나간 탓이다.

그동안 19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80~90년대의 마이카 붐, 계속되는 환경오염이 있었다. 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 승용차로 출퇴근하고 눈을 지겨워하는 우리는 예전보다 행복해진 것일까.

조현욱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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